1939년 신부는 다른 수사들과 함께 나찌 헌병들에 체포되었다가 석 달 만에 석방되었고 41년 2월에 다시 체포되어 폴란드 사람은 그 이름만 들어도 피가 얼어붙는 저 무시무시한 죽음의「아우시비츠」(폴란드 말로는 오센침)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여기서 신부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던가. 그리고 동료 죄수들에게 얼마나 치천사적(熾天使的) 사랑을 베풀었던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1941년 7월 말 신부가 수용된 감방에서 죄수 한 명이 탈옥한 사건이 생겼다. 이 수용소 규칙에 의하면 죄수 한 명이 탈옥하면 같은 감방의 죄수 10명이 아사형(餓死形)에 처해 죽기로 되어 있었다.
불운한 희생자 10명이 지명 당했는데 그 중에는 끊임없이 처자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레지스탕스」출신의 군인이 있다.
신부는 감연히 그 사람 대신에 자기가 죽기를 수용소장에게 청원했고 피 한 방울 없는 듯한 수용소장 조차 자청해서 창자를 말라붙게 하고, 핏줄을 불붙게 하는 지옥으로 가려는 신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기력을 잃고 말았다.
어쨌든 신부의 요구는 들어졌고 신부는 다른 불운한 사형수 9명과 함께 아사감방(餓死監房)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감방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들어가는 날부터 공포의 비명을 지르다가 죽어간 데 반해 신부 일행은 조용히 찬송가를 부르고 있어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보름 후인 8월 14일 신부는 같이 들어간 10명 중 가장 늦게, 그것도 숨이 채 끊어지지 않아 독약 주사를 맞고 임종했다.
9명의 동료에게 성실한 임종 준비를 시켜 사제로서의 임무를 마친 후 성모승천 전야(前夜)에 그리던 천상 어머님 품에 안겼던 것이다.
신부가 설립한 폴란드의「니에포칼라누프」는 그 대부분의 시설과 기재(器材)를 폴란드 인민정부에 압수 당했지만 아직도 3백여 명의 수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고, 일본「나가사끼」의 신학교와 수도원도 아직 남아 잡지「성모의 기사」를 호평 속에 속간하고 있다.
신부에 의해 살아날 수 있게 된 그 사형수 프란치스꼬 가죠프니체크 중사는 전쟁 후 석방되어 현재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으며 신부의 시복(諡福) 조사 때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신부는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1969년 가경자(可敬者)의 칭호를 얻었으며 1971년 10월 17일 파격적으로 사후(死後) 30년 만에 시복(諡福)되는 영광을 입었다.
또 신부의 뜻을 받드는 이탈리아의 꼰벤뚜알 성프란치스꼬회 선교사들은 1958년「이렇듯 아름다운 나라」한국에 상륙하여 대구 범어동, 부산대연동, 서울 한남동, 경남 동래군 일광면 등지에서 사목과 사회사업 활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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