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지요. 그이가 갈 데란 집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집에도 와 있질 않더군요.
초조할 때는 으레 시간이 거북이 걸음처럼 느린 법이죠.
그러는 동안에 억수 같던 비는 기세가 꺾인 채 추적거리더니 어느새 멎어 있었고 저녁 때도 지나버렸습니다.
이렇게까지 돌아오지 않다니 필경 또 무슨 불상사가 생긴 것이라고 가슴에서도 연방 콩이 튀는데 갑자기 황급하게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명이 어머니 계셔요?』같은 동리에 사는 아낙네가 뛰어들어오더니
『어서 나가 보세요. 선생님이 몹시 취하셔서는 진흙탕물이 흘러가는 개천가에 앉아 계셔요』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개천이라 해도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 아니라 일종의 복구가 안 된 상태의 하수구(下水構)인데 비만 오면 뒷산에서 몰려 내리는 물줄기가 게법 거칠어 이따금씩 예기치 않는 사고를 내기도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엎드려 무엇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다리 위에서는 똑똑히 식별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술기운으로 비틀거리시는 양반이 발만 삐뜩해도 거치른 물살에 휘말리실 게 아니에요』아낙네가 허둥거리며 쫓아와준 것은 정녕 고마운 노릇이 아니고 뭐였겠어요.
나는 아낙네가 일러준 장소로 뛰어갔어요.
어둠 속을 뚫고 비치기 시작한 흐미한 달빛이 제법 그 근방 풍경을 운치 있게 드러내기 시작하더군요.
쏴쏴 소리를 지르며 흐르는 탁류도 달빛 아래서는 청열한 물줄기로 보이니 그런 줄 알고 보는 눈에도 그리 나쁜 풍경이 아니더군요. 과연 흐미한 달빛 속에 움크리고 앉아 있는 그림자가 보이더군요.
나는 잡초가 마구 무성한 뚝을 헤치며 개천 가로 내려갔지요.
가까이 다가가니 그의 천진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천백아홉 천백열 천백열하나 천백열둘…』
그는 마치 숫자를 처음 배우는 어린 아이처럼 그 놀이에 골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저렇듯이 열심히 헤고 있는지 궁금도 했습니다.
나는 다가갔습니다.
나는 그의 놀음을 이 눈으로 목격해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뭐였겠습니까?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지폐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한 장씩 두 장씩 헤면서 물살 빠른 개천물에 띄워 보내는 놀이에 열중해 있던 거에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불길 같은 노여움이 온몸에 확 번지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손에 남겨져 있는 얄퍅한 지폐를 나꾸어 챘습니다.
『당신이 인간이요?』
나는 통곡을 터뜨리며 그의 가슴팍을 마구 쥐어박았습니다.
술에 취한 그는 내 행동을 마치 어린애가 부리는 어리광 정도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허공에다 대고 가가대소를 터뜨리더군요.
『아 시원하다. 시원하다. 더러운 걸 버렸다. 여보 어유 시원하다. 시원해』
이렇게 되어 내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이들의 등록금이며 묵은 이자며 외상값들은 모조리 어이없이 탹류에 실려 사라져 버렸지요.
나는 이제 그 사람을 정상한 사람이라 보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내 속에서는 증오가 노상 부글부글 거품을 피우며 끓어올랐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도 손도 발도 목소리까지 듣기가 싫었어요.
그는 점점 술 없이는 못 살게 되었고 나는 기회만 있으면 그에게서 도망칠 궁리만 했습니다.
내 얼굴빛은 썩은 나무빛이었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절망 속에서 허덕이지 않는 날이 없었지요.
어떻게 하면 광명을 얻을 수 있을까.
방법이란 한 가지밖에 없을 것 같았어요. 죽음, 그랬습니다. 그가 죽거나 내가 죽지 않는 한 이렇게 사방이 꽉 막힌 절망을 어떻게 뚫겠습니까.
그러나 저러나 생계가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별 도리 없이 나는 또 다시 친정 아버지께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버님과 나는 일종의 동병상린의 관계였지요.
그이를 마땅한 배필이라고 적극 추천하신 분이 아버님이요, 그 추천에 적극 호응한 것이 내가 아니겠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당신이 사윗감을 잘못 골랐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르지요.
그때문인지 아버님은 기울어지는 가산을 정리하여 내게 얼마만큼의 목돈을 쥐어주셨습니다.
『이게 마지막이다. 이걸로 네 분수에 맞는 사업을 아무 거라도 좋으니 시작해 보아라』
나는 아버지가 주신 마지막 돈을 눈물로 받아쥐었죠.
이제는 배수진을 칠 때가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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