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일 양국이 대한을 정치적으로 침략하여 결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국내에서는 각종 정치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모두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투쟁 목표로 내세웠다. 모두가 다 이 나라를 외세의 침략에서 방어하고 자주독립을 쟁취함에 있어서 주어졌다고 자처했다. 그러나 수많은 단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대체로 보수 아니면 진보로 양분할 수 있다. 보수파는 구정체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한 반면에 진보파는 근본적인 개혁을 외쳤다. 동학당과 의병은 전자에 속했고 일진회와 공진회 같은 단체는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수많은 단체 앞에서 특히 외국인 신부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격변하는 시국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단체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는지 많은 신부들이 교구 통신부에 문의해 왔다. 이에 교구통신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던 일진회와 진보회에 대하여 민 주교의 설명을 들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방의 진보 회원은 모두 일진회라고 불리우는 진보주의자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지방의 진보회는 얼마 전에 서울의 일진회에 통합되었다. 1개월 전에 서울에 공진회란 또 다른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공진회의 강령은 일진회의 강령은 일진회와 동일하며 다만 삭발하지 않는 것이 다를 뿐이다.
공진회는 일진회와 대립시키고자 한때 정부에 의해 조직되었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두 단체가 완전히 통합되어 버렸다. 1898년 독립협회가 부상에게 패배한 일도 있고 보니 일진회가 부상들을 공진회 같은 단체에 가입시켜 그들의 공격을 미리 방어하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들 모두가 일본인들의 지지 내지는 지도마저 받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의 강령은 훌륭하지만 그 방법만은 혁명적이다』
이상과 같이 교구 통신이 간파한 것처럼 소위 진보주의자들 배후에는 일인들이 있었고 그래서 사실은 그들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1904년 초에 벌써 일본 헌병대가 서울과 그 인근의 경찰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알고 보면 진보주의자들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 경위를 교구 통신은 이렇게 설명한다.『지난 12월 29일 진보주의자들은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대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모였다. 정부는 경찰과 군대를 시켜 그들을 해산시키게 했다. 진보주의자들과 한국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곧 일본 경찰이 간섭하였고 이어 일본 군인들도 쫓아왔다. 일본군인들은 한국 군인들을 쫓아버렸다. 일본 참모부는 이날부터 일인들이 서울과 그 인근의 치안을 책임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진보주의자들은 서울에서는 쇠퇴해가고 지방에서는 해산되었다.
가끔 독립문에서 모였으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소식은 한결같이 露國에 불리한 소식만 들려왔다. 이 해 벽두에 이미 日軍은 여순항을 함락시키고 봉천에 육박하고 있는 반면에 露軍은 도처에서 계속 후퇴하고 있었고 노국의 발틱 함대도 겨우 인도양에 와 있었다. 뿐더러 露國 내에서 일어난 혁명은 일층 일본군의 승리를 굳히게 했다. 마침내 미국의 조정으로 노일 양국간의 강화 협상이 추진되게 되었다. 강화조약은 전문 15항목으로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우리나라와 관련된곳은 『노국이 대한에 있어서의 일본의 행정적 군사적 정치적 특권을 인정한다』는 조항이었다.
일본은 소위 우리나라의 독립을 일층 보장한다는 구실 아래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조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외국인 고문을 축출하고 일본인 고문으로 대치했다. 또한 한국 우표 대신 일본 우표가 강매되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화폐의 개조와 정리를 서둘렀다. 화폐의 단위가 일본에서와 같이 金本位로 바뀌고 일본의 제일은행이 서울을 위시하여 국내 주요 도시에 설치되어서 신구화의 교환과 회수를 맡아보았다. 그 결과 엽전과 백동의 교환령이 내렸다. 교구 통신은 신부들이 구화의 교환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수시로 화폐의 개조령을 상세히 보도해 주고 있다.
이때에 일어난 이상의 사실 외에도 특기되어야 할 몇 가지 사실은 용산신학교에 50kg짜리 새 종이 설치되었고 또 6월 3일에 이종국(바오로) 신부가 불과 32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하였으며 성바오로수녀원의 에스뗄 수녀가 병석에 누운 지 하루 만에 47세를 일기로 17년간 정든 한국 땅에서 선종했다.
끝으로 교구 통신은 하와이 이민의 비참한 현지 소식을 알리면서 한국민의 무작정 이민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6월 3일. 박(POISNEL)신부는 하와이의 선교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을 여러 신부들에게 알리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 그 중에는 그리스도 신자들도 적지 않은데 그들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꾐에 넘어가 이 섬으로 이민해 왔다. 그런데 그들이 이 섬에서 당한 일은 이러하다. 선교사의 편지를 그대로 옮기려 한다』『한국인들의 생활 조건은 부러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결국 이민자들은 속았다. 여러 신문들이, 한국의 신문마저도 하와이 이민의 유리한 조건을 소개해마지 않았으나 이곳 사정은 그러한 이점을 조금도 제공하지 못한다. 신문의 보도는 이제 이렇게 바꾸어져야 할 것이다.「하와이 이민이란 결국 이곳 지주들에게는 돈을 벌게 하는 반면에 이민자들 자신은 점점 가난뱅이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좋은 곳이다」라고.
이곳에는 이미 25년 전에 이민온 포르투갈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자녀가 5.6명이나 되고 아버지의 한 달 벌이는 18달러에서 20달러 정도이다. 그런데 밀가루 한 포대 값은 1달러 50센트이고 쌀 한 포대은 3.4달러씩이나 한다. 그 밖에 의류값 등을 제하고 보면 남는 돈이란 별로 없다. 그들이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가 않다. 지주들이 목표하는 바는 모두가 사복을 채우는 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적은 임금으로 사람을 고용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을 이민오게 하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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