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델ㆍ이 주교를 비롯 전기 네 신부가 관헌의 눈을 피해 입국하던 시기는 조선정부가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기 전후한 때로 다소 정세가 어수선한 때이기도 했지만 청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압력으로 옛날처럼 성직자를 목벨수 없는 상황이었다.
첫 예가리델ㆍ이 주교의 경우였는데 이 주교는 입국한지 4개월만인 1878년 1월28일에 서울서 체포되어 5개월간 옥살이를 하다 만주로 추방되었고 드게뜨ㆍ최 신부는 이듬해 5월15일 공주지방에서 체포된후 역시 4개월만에 만주로 추방된데는 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참수 아닌 추방은 10년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수없는 일이었지만 세월의 흐름은 이같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이즈음 조선교구를 담당 국내와 만주지방에 머물러있던 신부는 추방된 이 주교를 위시해 국내에 블랑 백ㆍ도세 정ㆍ로베르뜨 김 세 신부와 만주의 뮈뗄 민ㆍ리오빌 류ㆍ추방된 드게뜨 최 신부로 팀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880년 뮈뗄 민 신부와 리오벨 류 신부가 새로이 입국하고 이어 85년까지는 드게뜨 최 신부를 비롯해 6명의 성직자가 입국함으로서 조선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모신 가운데 점차 넓어져가는 박해의 불안속에서 새로운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교회에는 실제로 10명의 성직자가 있었으나 교구장 리델 이 주교는 추방된후 다시 입국치 못하고 만주와 일본등지서 조선교회를 돌보다 신병으로 본국 불란서에서 요양중이었다.
이 주교의 병세가 점차 악화되자 교황청은 1882년 블랑 백 신부를 주교로 승품함과 동시에 조선교구 7대주교로 임명했다.
아직 한불 수호조약이 체결되지 않았지만 이보다 앞서 체결된 한미 수호조약이 비준되면서 1883년부터는 공공연하게 대낮에도 교우집을 방문할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교우도 1만2천을 헤아리는 때였다.
1883년 7월 블랑白 주교가 성성직을 가진 때를 전후해 점차 잃어가기 시작한 신교 자유의 확신은 신자의 증가와 함께 더 많은 성직자를 필요로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2년동안에 걸쳐 전기 6명의 신부가 만주로부터 새로히 입국함을 계기로 신교 자유의 여명기를 맞이할 준비도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들팀이 주도면밀하게 닦아놓은 조선교회의 기초들을 살펴보면 ①신학교 설립-성직자들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지자 교우수도 늘게되니 무엇보다 성직자 양성이 급선무였다.
이에 블랑白 주교는 1885년 5월 마라발 서 신부로 하여금 강원도 원주 부흥골(現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초가 몇간을 매수해서 임시 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생수는 이에 앞서 말레이반도 서쪽「페낭」이라는 곳에 설립된 빠리 외방전교회 운영 신학교에 유학하다 기후가 맞지 않아 돌아온 4명과 국내서 입학한 3명으로 도합 7명이었다.
이 신학교는 3년간 운영되다 1886년 한불 수호조약과 함께 교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봄에 따라 1887년 용산으로 옮겨져 신학교의 전통을 잇게되었다.
②성당터 매수-박해가 휘몰아치던 시절에 있어서도 성직자들은 서울과지방에서 조선교우의 이름으로 집을 사들여 신부님 댁이나 신학교로 사용해왔다.
이들은 특히 교회와 관련이 깊은곳의 땅을 사들여 앞으로 세워질 성당이나 신학교의 부지로 확보해두곤 했는데 성당터로 먼저 사들인 곳이 조선교회 창설기에 집회소로 삼았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있던 명례방(明禮坊ㆍ현 명동성당 자리)이었다
이 자리는 1883년 교회소유로 이전된 것이 확실하고 이어 1882년에는 순교지로 이름난 서소문밖 네거리 북쪽에있던 수렛골(현 순화동)에 강당을 세우고 1892년에는 그 서쪽에 있는 언덕(현 중림동성당 자리)을 사들여 이듬해 한국 최초의 벽돌성당을 지으니 이는 박해를 딛고 일어난 조선교회의「승리의 탑」이었다.
수녀원 진출-블랑白 주교는 교회가 차차 안정을 얻어가자 1880년부터 사회에서 버림받은 병자와 고아들을 모아 서울 곤당골(현 을지로 1가 미대사관 서축)에 기와집 한채를 사서 기르게하는 한편 종로 똥골(현 관철동)에도 집을 마련해 의지할곳 없는 노인 고아들 1백4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우들 손만으론 돌보기 어렵게되자 1887년7월 불란서 샤르뜨르 바오로 수녀회에 이 일을 돕는 한편 선교활동을 도와줄 것을 요청, 이듬해 7월22일 4명의 수녀가 이 땅에 첫발을 딛게되었고 성바오로 수녀회는 이후 85년간 한국교회와 밀착된 호흡속에 교회 발전에 큰몫을 담당하는 수녀회가 되었다.
성서출판소 설치-전교와 영신지도에 있어 박해에 버금가는 애로는 각종 기도서와 교리서를 마음대로 가질수 없는 점이었다.
병인박해후 입국한 리델李 주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주에 나와있던 꼬스뜨高 신부로 하여금 일본「나가사끼」에 근거를 두고 교리서를 인쇄케하여 사용해 왔는데 1888년에는「성서활판소」를 서울 정동으로 옮겨 많은서적을 박아내게 되었다.
이때 가져온 대ㆍ중ㆍ소 세가지 한글활자는 1878년 순교한 교우 최지혁의 글씨를 본 뜬 것으로 이후 여러 출판소에서 쓰게된 최초의 근대식 한글활자였다.
이렇듯 여명기의 성직자들은 온갖 고초 가운데 신교 자유가 오리라는 확신을 갖고 순교자들의 피 위에 한줌의 꽃씨를 심어 가꾸어왔으니 여명 80수년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다음신학교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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