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애씨!
지금 생각하니 그때 나에게 책방을 차리라고 적극 권장해준 이가 바로 윤홍노씨였어요.
나는 남편에게 의논하지 못하는 일을 그의 제자들에게 상의했어요. 책방이 제일 무난하다는 중론이고 내 생각도 그럴 듯싶어 책방을 열기로 했어요.
근방에 학교가 많았던 탓인지 책방은 제법 잘 되더군요.
경제적 실력이 차츰 붙게 되자 남편과의 사이는 더욱 악화됐습니다.
남편은 점점 주사가 심해졌습니다.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 돈을 벌겠다구? 흥!』
그는 어쩌다 퇴근길에 책방에 들리면 술 기운을 빌어서 책을 보고 있는 손님들을 모조리 쫓아냈습니다.
『여러분! 책을 보시려면 도서관을 이용하시오. 여기서는 돈을 신처럼 숭상하는 여자가 당신들 주머니를 노리고 있는 걸 모르슈?』
손님을 끌어들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와 있는 손님까지 내쫓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뭉쳐 있던 분노가 확 터져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옆에 있던 의자를 번쩍 쳐들고(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도 모릅니다) 손님을 내쫓고 있는 그의 뒷통수를 잽다 질렀습니다.
어지간한 힘이었나 보죠? 부수수한 머리칼이 추저추적 젖기 시작하더니 목덜미께로 주루루 피가 흐르지 않습니까?
피를 보자 제정신을 잃은 나는 미친 여자처럼 뛰어나갔습니다.
뒤에서 마구 쫓아오는 것만 같이 정신 없이 뛰다 보니 우리 동리 앞을 지날 때 노상 무심히 스쳐가던 성당이 눈에 띄더군요.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았지만 숱한 몰잇꾼이 나를 잡으로 쫓아오는 것만 같았어요.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숨을 곳은 없을 것만 같이 절박한 초조감에 휩싸일 때 내 눈 속으로 뛰어든 성당!
나는 지체 없이 그 안으로 달려갔습니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성당문은 스르르 열리더군요.
나는 떨리는 몸과 마음을 가눌 길 없이 성당 마룻바닥에 엎드려 버렸습니다.
한밤중 같이 무르익은 고요가 내 몸과 마음을 아무런 조건없이 받아들여주는 포옹의 깊이를 느끼고 나는 불현듯 고개를 쳐들었지요.
자비로운 미소가 나를 위로하듯 내려다보심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내 등줄기를 타고 선열한 전율이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이여! 우리는 같은 아픔 밑에 태어났노라!』
내가 들은 건 환청(幻聽)이었을까요? 어쨌거나 내가 들은 목소리는 핏자국이 낭자한 내 영혼 위에 신비한 묘약(妙藥)의 작용을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여인이여, 우리는 같은 아픔 밑에 태어났노라!
나는 그분과「같은 아픔」과 함께 있다는 실감으로 하여 온몸을 떨었습니다.
『같은 아픔』, 그렇습니다.
성령을 잉태한 처녀의 몸이 세속에서 당한 아픔을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분의 아픔은 그러나 이 세상의 구원과 긴밀히 맺쳐 있던 것입니다.
나의 아픔이 갑자기 독자성에서 벗어나 보편성을 띠는 순간, 나의 손길은 수많은 다른 아픔들과 굳게 손을 잡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외로움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나 자신을 느꼈습니다. 나는 또 다시 이번에는 몹시 경건스럽게 고개를 쳐들어 그분을 보았어요. 그분의 미소는 해탈(解脫)의 미소였습니다.
나는 조용히 그분 앞을 물러났습니다.
남편의 상처는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남편의 술주정은 여전했지만 나는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곤궁에 빠질 때는 으레 성당으로 뛰어들곤 했습니다.
나는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언제나「같은 아픔」으로 맺어져 있는 연대감이었어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여전히 이상의「계시」는 없었습니다.
어느날 통금이 임박한 한밤중이었습니다. 나는 그날의 매상을 계산하고 있었죠.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대문을 걷어차는 남편의 혀꼬부랑소리가 동리의 고요를 박살내고 있었어요. 남편은 대문을 마구 걷어차며 『주인 오셨다. 문 열지 못할까!』큰 소리로 고함을 지릅니다.『아니 이눔의 집에는 아무도 없나! 대문은 무엇 때문에 걸어 잠구는 거야! 더럽다 더러워 퇴퇴!』
마구 침을 뱉는 소리도 들립니다. 동리가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나는 고무신을 거꾸로 끼듯이 당황하며 대문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빗장을 여니 남편의 옷은 어느 시궁창을 헤매고 다녔는지 코를 찌르는 구정물 냄새와 술 냄새가 어울려 세상에도 기괴한 악취를 풍기는 게 아닙니까.
달빛을 등지고 비틀거리며 서 있는 남편이 몽롱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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