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여 년에 걸친 박해 속에 성장해온 한국 가톨릭은 약 2만 명에 가까운 순교자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린 자랑스러운 순교사를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는 해마다 9월 복자성월이 되면 이들 가신 님들의 위업을 추모, 순교정신 앙양을 위한 갖가지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어떻게 어디서 죽어갔는지 순교 성지 및 그 유물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보에서는 복자성월을 맞아 서울 절두산성당 순교자 기념관 내의 순교 유물을 소개함으로써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써 항거한 그 위업을 기리고자 한다. <편집자註>
옛날 박해 때 천주교 신자를 죽이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참수ㆍ태형ㆍ옥에 가두어 굶겨 죽이기ㆍ얼굴에 물 축인 종이를 발라 죽이는 질식사 등.
그런데 여기 있는 가운데 구멍이 뚫린 이 돌은 앞의 떠들썩한 방법 외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또 다른 방법이 행해졌음을 말해 준다.
직경이 1m 둘레가 5m쯤 되는 바위 가운데 앞 직경이 20cm 뒷직경이 6cm 되는 원추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엎어놓고 보면 돌절구 같기도 하지만 세워 놓고 이 구멍에 머리를 디밀게 하고 앞에서 목에 맨 줄을 힘껏 잡아당긴다면 훌륭한 교수대 역할을 한다.
바로「돌 교수대」인 것이다.
63년 봄 충북 수안보본당은 성당에서 약 20리 떨어진 문경새재 부근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에 있는 큰 기와집 한 채를 연풍공소로 쓰려고 1백10만 원에 사들였다. 낡아빠진 집을 수리하는 데 대들보를 갈던 목수가 대들보에 구멍을 파고 집어넣는 상량문을 발견 읽어보니 건물은 바로 1691년에 세운 포도청 청사였던 것.
얼마 후 다시 마당을 정리하던 중 회장 김창식씨가 문제의 이 돌을 발견했는데 처음엔 무엇에 쓰는 돌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 고을의 84세 된 심 노인에게 고증을 의뢰했더니 그것은 천주학쟁이를 비롯 죄인을 죽이던 교수대이며 종교 자유가 허락되자 바로 이 포도청 뒷뜰 안에 묻어버렸으며 강당에서 현 도살장은 그때 사형장이었다는 사실까지 자신 있게 고증 교수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1866년 3월 30일 대천 앞바다「갈매못」에서 세 불란서 신부와 함께 순교한 황석두 회장(1968년 시복)의 태생지이기도 하고 1869년 4월 23일 전바오로(23) 김요셉(68)이 이 교수대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한결 실감이 난다.
돌 교수대는 대원군이 너무 많은 신자를 공공연히 처형, 민심이 좋지 않음을 보고「소문 없이 죽이라」는 지시에 따라 고안된 것으로 사학가들은 풀이하고 있다. 금년 8월 5일 연풍공소에서 서울 절두산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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