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적인 보호조약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고 이어 일인은 서울에 통감부를 두고 소위 보호정치를 감행하게 되니 한일간의 충돌은 일층 빈번해지고 더욱 치열해졌다.
항일 투쟁의 일선에 나선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의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조직이나 훈련이 아주 미비해서 그들이 실패하리라는 것은 뻔히 내다보였다. 예측한 대로 충청도 홍주에서 일어난 의병의 궐기는 곧 일병에 의해 진압되었다.
도처에서 이와 비슷한 의병의 항거는 결과적으로 주님들에게 끼치는 피해가 막대하였고 뿐더러 애국을 가장한 그들의 횡포와 약탈은 신부들의 공소 방문까지 어렵게 만들었다.
의병과는 정반대 방향의 운동은 때를 같이하여 일어나고 있었다. 새로운 상황에 재빨리 적응하며 보다 강한 자의 편에 서서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은 어느 때이건 있는 법이다. 이 무렵의 소위 진보주의자들을 우리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인들은 표면상으론 도무지 생색내지 않고 있었으나 실지로 진보주의자들을 배후에서 두둔하고 있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진보주의를 내세운 단체 중에서 두드러진 것으로는 신불교파ㆍ신동학파ㆍ교육회 등이 있었다. 신불교파는 종래의 한국 불교를 일본식으로 쇄신하려 했고, 교육회는 새로운 방법에 의한 교육에 그들의 노력을 경주했으며 신동학파는 종래의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국교로 자처하려 했다. 그런데 우리 천주교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단체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우리 교우를 적대시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여러 지방에서 그들과 천주교인 사이에 충돌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라도 남부 일대와 그 인근 도서지방에서 충돌이 가장 심했다. 완도에서는 일진회원이 작당하여 천주교 신자 집을 습격하고 금품을 약탈해 갔다. 또 진도에서는 자칭 협동교육회원이라는 자들이 우리 신자에게 폭행을 가했다.
그런가 하면 해남과 목포에서는 도리어 천주교도들이 행패를 부릴 뿐만 아니라 일진회원에게 폭행, 그들을 감금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소위 황해도 사건 이래에 수교인과의 충돌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시켜 천주교를 방해하려 했다. 심지어 영국인 목사는 영일동맹을 자랑해 마지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왜 신부는 독신생활을 하는가?』『왜 마리아 상을 공경하느나?』『왜 미사 예물을 받는가?』등등 판에 박힌 중상과 모략이 도처에서 되풀이되었다. 이에 그들의 악착스러운 선전과 비방을 개탄하지 않는 선교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해는 지금까지 협박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금년에 와서 천주교인과 예수교인은 불행히도 무력 충돌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한 무력 충돌이 생긴 곳은 전주지방이었고 또한 그것은 민 주교가 그 지방을 순시하던 때에 일어났다. 주교가 있는 동안은 예수교인이 협박을 한데 그쳤으나 주교 자신이 습격을 받았다는 소문이 어느 사이에 교회 안에 퍼졌다.
그래서 교구 통신은 사전의 진상을 교구 신부들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해 주고 있다.『사건은 이미 전년(1905년) 11월에서 비롯된다. 마침 金溝 수류본당의 배(PeYnet) 신부가 민 주교와 같이 전주 읍내에 가 있는 사이에 예수교인 최중진이가 수백 명을 작당하여 수류본당을 습격하고 교우들을 잡아갔다. 이 소식에 접한 배 신부는 즉시 정복사를 시켜 전라감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동시에 당국의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최중진은 달아나 버렸고 예수교인 측에서 타협을 청해 옴으로써 양자간의 화해가 성립됐다.
그래서 배 신부는 복사와 마부를 데리고 안심하고 공소 방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접주리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예수교인 수백 명이 신부 일행을 포위하였고 복사를 학대하고 말리는 마부도 마구 구타했다. 싸움을 말렸으나 소용이 없자 배 신부는 공포로 위협했으나 그들은 물러나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신부는 실탄 일 발을 쏘았다. 한 명이 팔에 부상을 입은 것을 보자 급기야 모두 달아났다. 신부는 길을 계속해서 용강공소에 갔으나 하룻밤을 지내고는 즉시 본당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에 예수교인들이 일본 헌병과 한국 순경을 앞세우고 정 복사를 체포하려 왔다. 신부는 정 복사를 전주로 피신케 했다.
마침내 정부는 사건 수습에 나서게 되었고 사건 진상 조사차 일본 헌병이 현지에 파견되니 예수교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의 조사는 다행히 천주교 측의 주장을 시인함으로써 이 지방에서의 예수교인들의 행패로 끝냈다.
끝으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주간「경향신문」이 바로 이 해에 창간되었다. 그런데 경향신문의 발간은 신부 피정 때 신부들의 총의로 결의되었었다. 그 후 교회 당국은 10월 초에 창간호를 내보낼 계획을 세우고 이미 8월부터 그 준비에 착수하였고 우선 그때 용산신학교 교수이던 안(Demange) 신부를 편집 책임자로 임명했다.
임명 받은 안 신부는 곧 경향신문 발간의 취지와 내용, 체재와 구독 방법 등을 알리는 회람장을 8월 27일자로 교구통신 구독자들에게 돌렸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경향신문의 주요 목적은 이 신문을 통하여 교회의 건전한 교리를 전파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구독자의 대부분이 천주교인일 줄 알면서도 비종교적인 제호를 택한 이유는 외인들에게도 읽히기 위해서이다. 이상의 주요 목적 밖에도 법률 상식과 같은 유익한 자료도 제공할 예정이다. 뿐더러 국내 소식과 외국 소식도 적지 않은 지면을 차지한 것이고 한편 교우들을 위해서 특히「대한성교사기」를 실을 계획이다. 각 호의 내용을 요약하면 논설, 관보, 국내 소식, 외국 소식, 대한성교사기, 기타 소식. 광고 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전체가 8페이지로 구성되는데 4페이지는 일반 신문과 동일한 크기와 내용이 될 것이고 남은 4페이지는 다시 반 절하여 8페이지로 만들어 대한성교사기를 실을 것이다. 끝으로 구독료는 1부일 경우 1년분이 80전이고 7부 이상일 때는 1년분 1부 값이 52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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