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가「성웅」으로 추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복자 김대건 신부는 그의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통해 신앙의 위대한 교훈을 남겼다.
그의 체취가 어린 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진 몇 통의 서한. 이국의 나그네 길에서 또는 죽음을 목전에 둔 감옥에서 남긴 글에 샘솟듯 용솟음치는 불굴의 의지는 오늘을 사는 후손의 가슴에 맥맥히 이어져 신앙이 위협을 받을 때 서슴없이「순교정신」으로 무장케 하는 원동력이 되고있다.
이 위대한 신앙의 의지 이상 가는 유물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의 생애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유물이 드문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모자술 두 가닥과 청동제 탁상용 칼 한 자루가 그의 유일한 유물이다.
길이 21cm 손잡이에 성모상이 새겨진 이 칼은 전 서울대 교수인 김상기 박사가 기증한 것이고 비단실로 꼬은 길이 5cm와 1 .5cm의 두 가닥 술은 주인만큼이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절두산에 소장된 사연을 지니고 있다.
1844년 12월 15일 만주「소뺘갸즈」(小八家子)에서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여러 차례 입국을 시도했으나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 마침내 1845년 1월 1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 변문 수채 구멍을 통해 입국한다.
김대건 신부는 떠나면서 입고 있던 중국식 두루마기와 모자를 중국인 팅씨(丁安德助) 가족에 기념으로 주었는데 그 후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 첫 신부임을 안 팅씨 가정은 가문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심이 깊었던 팅씨는 가족 중 누가 아프면 열심히 기도하고 두루마기나 모자를 덮어주면 병이 낫는 것을 보고 이웃에 빌려주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마음씨 검은 한 이웃이 두루마기는 영영 갖고 가버리고 모자만 남게 되었다는 것.
그 후 모자마저 어느 중병 앓는 신부에게 빼앗기고 그때 얻어놓은 술만 후에 수녀가 된 딸이 간직하고 있는 것을 1944년 유영근 신부가 사정사정 몇 가닥 얻어다 몇몇에게 나누어준 것 중 그나마 6 ㆍ25사변 통에 많이 없어지고 겨우 두 가닥만 남아 절두산에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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