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회일각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다. 또 지난 4월 25일 국제사면위원회도 사형제도를 적용하고 있는 1백여 국가에 대해 이를 폐지토록 촉구한바 있다. 이에 따라 본보는 최근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서독 신학자 프란츠 푸르가르 저서 「생활영역의 윤리학」을 통해 사형제도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살펴본다.
인간이 자신의 행동으로 남의 생명을 파괴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을 더 이상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때, 또 인간이 자신의 삶을 「살 권리」를 잃을 경우에 그리고 엄청난 강력범죄를 저질렀을 때, 사람들은 사형언도를 요구하고 나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때 도대체 범죄자에게도 정의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요구가 있겠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악행자가 사형당하기를 바라는 일시적인 사회의 흥분에도 불구하고 범죄자 역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오로지 범죄자를 좌지우지할 목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재판에 의해 범죄자가 마음대로 다루어져도 좋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마지막 확신은 여전히 범죄자의 인간 존엄성이란 문제를 재고해 보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범죄행위와 형벌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이해가 힘들 것이란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을 결코 잃지 않았다는 느낌은 진실로 우선돼야한다. 즉 순수한 양심적 판단으로 이 느낌은 이 문제들을 분명히 올바르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로운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인식하고 스스로 계획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그 분의 창조적 형상능력을 반영하고 있고 또 그러기 위해 인간이 하느님께 개별적으로 대답할 능력과 의무를 가져야할 책임을 문자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본연의 성격은 원초적인 창조의 목적을 무시하고 인간이 창조주의 파트너로서 뿐만 아니라 실상 전적으로 모순되게도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 까지도 실현시킬 수 있다는 데까지 확대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까지도 자유의사로 할 수 있다.
이웃을 해치고 그로인해 창조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범죄는 처음도 끝도 일관되게 하느님께 대한 신성모독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범죄가 하느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근본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총체로서의 창조와 창조주까지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이때, 자유롭고 오만방자한 자의(恣義) 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가 이웃의 권리와 요구를 무감각하고도 간단하게 무시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실제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하느님의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로써만 보는 범죄는 결코 최종적이라거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전적으로 계산된 행동으로 그 책임까지도 예상하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조건하에서도(이것은 단지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될 것이다) 인간에게는 여전히 자신의 결정을 되돌아 볼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살아있는 한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살아있는 한 그를 없는 사람인양 포기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며,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이는 이성이 온갖 예측을 하게 하더라도 여전히 순수하게 인간적인 마음으로 언제나 그에게 새로이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것이자 언제나 새롭게 경험하는 구원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약속되어 있는 용서를 믿고 있는 자로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질서로부터 멀리 떨어지고자 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서 이 가능성을 결코 부인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 힘자라는 한, 여론이 형법과 형집행을 주장하는 만큼이나 적극적으로 용서할 준비를 각 개인의 영역에서 해보라고 권장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여론의 영역에서는 범죄자에 맞서 보복하고 복수하는 감정이 표면에 나서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 역시 바로 그 멀어진 곳에서도 여전히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돌아오라는 부름을 듣고 있는 피조물이며 이 피조물 위에 하느님만이 홀로 재판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은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비교ㆍ마태오7, 1: 로마서12, 9).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쩐지 인간의 지각과 오성(悟性) 에 반(反)하는 것 같다. 일찍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것을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듯하며,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한번은 아주 놀라 예수께 정말로 어떤 사랑을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만 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더 이상 바랄 수 없도록 분명하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혼 일곱 번까지라도』 즉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남을 용서하고, 그래서 그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는 것이 언제나 새로운 의무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그러한 관대함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한목자 안에서의 화해란 의미로, 특별히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마음을 써야하며 테러나 협박 같은 강력범죄의 잔인무도함에 대해 내면으로는 온 힘을 다해 반대해야 하면서도, 화해와 용서의 의무를 그리스도의 후계자로서 강하게 느껴야만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범정과 그 관할 당국의 역할은 재판하고 벌을 주는 하느님의 최후 법정을 모방하는데 있지 않다. 게다가 자비와 은총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이 역할은 이미 일어난 범죄행위에 따라 가능한 공정한 벌을 주고 그리하여 무죄한 사람에게 더 이상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예방하는데 놓여있다.
따라서 한 인간의 자유와 자주를 제한하는 단호한 조처는 그것이 형사재판의 판결이라 할지라도 예방조처 내지 배상조처로써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지 범행에 대한 당연한 죄의 대가를 인간이 부과한다는 본래 뜻으로 봐서는 안 된다(속죄란 것은 먼저 당사자가 그것을 속죄로 받아들이고 개인적으로 깊이 숙지할 때 성립되는 개념인 것이다).
육체적 형벌은 일반적으로 모든 윤리적 의미를 배제하고 있다. 교육의 장에서 그 찬반이 활발하게 토론되고는 있으나 반대의견이 지배적인 체벌에 대한 입장은 재판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체벌은 도덕적 품성을 개선ㆍ발달시키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체벌을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으로 이용한다면, 그러한 훈육은 완전히 비윤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결함을 직접적이고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체벌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이란 절대적 가치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며, 고문을 통해 도달하려는 가치들에 이 인간의 절대적 가치는 너무나 정당한 권리를 갖고 대립하고 있어서, 부득이한 경우에라도 방책으로써의 고문은 고려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벌로써의 사형
속죄란 의미로서의 사형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즉 윤리적 판단은 여기에서 절대적이다. 그러나 만일 이 사람이 계속 더 살게 됨으로써 직접적으로 다른 무죄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것이라고 증명될 때 즉 이 예방조처를 위해 사형 이외 다른 가능성이 더 이상 있는 것 같지 않을 때, 예컨대 천재지변 후의 약탈자나 현대세계의 테러집단 등과 같은, 그리고 구속된 자가 동료를 강압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인질납치 등이 새롭고 까다로운 문제로 대두될 때에는 상황은 달라진다.
구속된 테러리스트 때문에 선량한 인질을 이용하는 종류의 협박과 같은 실제적 위험이 예상될 경우, 여론이 점증되는 폭력의 위험 때문에 윤리적으로 극단적인 억류를 요구한다고는 해도 사형언도만이 유일한 보호조처인지를 재삼재사 고려하는 것을 근본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증거가 분명한 살인사건의 경우에 이 살인자의 죽음이외는 그 분란을 막을 수 없어서 사형언도가 내려지고 집행된다면, 이것은 사실상 그리스도교 윤리학이 최근 몇 년간 일관되게 견지해 온 입장처럼, 별로써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무죄한 이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사회에서 권한이 있고 합법적인 재판소를 통해 공동선 질서와 불가피한 방어를 견고하게 하려는 행동으로써 여겨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조건 하에서도 특히 점증하는 악순환의 폭력의 위협 때문에 아주 신중해야만 한다.
사형언도와는 반대로 그러한 극단적 조처가 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생존에 대한 벌이나 인간의 생명을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대개 단순한 일벌백계의 효과를 노려) 오히려 사회안정과 다른 사람의「생명의 보호수단」을 문제시했기 때문에서이다.
또 이러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한 보호수단이라는 것도 그리스도교인의 그리스도교적 비폭력이란 이상(理想) 때문에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해야하는 것이긴 해도 그것이 만일 선량한 제3자의 목숨이 관계될 때 즉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사하는 조건 없는 생살여탈권은 이미 언급한 모든 원칙에 따라 제한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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