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한 일본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격분한 민중은 연이은 시위와 폭력과 무력의 비일투쟁을 가열시켰다. 끝까지 항거하는 한국인에게 일본은 총과 대포로 응했다. 군대 해산 당시의 비통한 모습을 우리는 교구 통신에서 엿볼 수 있다.
『8월 1일 오늘 큰 소란이 일어났다.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기로 결심한 일본인들은 서소문 병사의 한국 군인들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우리 군인들이 병사에서 나오기를 거절하자 일인들은 무기를 사용했다. 4백 명 중에서 2백 명이 살해되었거나 중상을 입었다. 나는 이 불쌍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목겼했다. 참으로 말할 수 없이 불쾌한 광경이었다.
수많은 일인 남녀와 애들까지 나와서 지나가는 장례 행렬을 보고 야유했다』
해산된 옛 군일들은 지방으로 내려가서 의병과 합류했고 그들과 합세하여 일인에게 무력으로 대항했다. 특히 수도 근방과 동쪽 산악 지대를 근거로 하고 있는 의병들이 많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의병들 중에는 약탈과 강도행위가 잦았다. 때로는 일인들을 동정했거나 그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했다는 구실하에 온 부락을 불지르기까지 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어느 도시나 부락이 의병에게 활동 기지를 제공했거나 그들을 피신시킨 혐의를 받게 되면 이번엔 일인들로부터 복수를 받았다. 그러므로 의병과 일병 사이의 싸움터가 되어야 했던 지역 사람들의 참상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전교 신부들도 의병과 일병으로부터 똑같은 습격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정 아오스딩 신부와 강말구 신부는 호신용으로 갖고 있던 총을 의병들에게 뺐겼다.
의병들의 이와 같은 행패는 비록 산악 지대인 강원도가 가장 심했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전국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황해도에서도 순시 중인 민 주교마저 의병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일부 의병들의 탈선 행위가 앞으로 의병운동에 끼칠 나쁜 영향을 우려하여 의병 두목들은 재한 외국인들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그들의 원수가 절대로 외국인이 아님을 선언하게 되었다.
『9월 10일
한편 의병들에게 도움을 주었거나 아니면 일병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학대를 받은 신부들도 있었다. 그 일례로 沃川의 홍 루까 신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9월 15일 홍 루까 신부는 일본 군인들의 침입을 피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일본 군인 25명을 신부 댁에 숙박케 하라는 요구를 받았었다. 그렇다면 신부는 다른 데 가서 기거할 수밖에 없었다. 성당과 사랑 모든 것이 일병들에게 점령되어야 했다. 신부가 없는 동안 모든 것이 타협되었다. 일병들은 주인이 없는 것을 알고 숙박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뿐더러 그들은 하룬가 이틀인가 읍내에 머물고선 의병을 찾아서 떠나갔다.』
그러나 일본군 측은『병졸 8명에게 숙박을 허락했더니 실제로는 30명이 숙박한 고로 선교사는 부득이 상경했다』는 보고가 오보이라고 하면서 홍 신부에게 시말서를 요구했다. 그래서 홍 신부는 그것이 오보이고 사실은 한 명도 숙박하지 않았다는 시말서를 써야만 했다.
예수교의 발전은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는 예수교는 도처에 병원과 학교를 세워 많은 신자를 만들 수 있었다. 당시의 장로교 신자는 6만 명 감리교 신자는 4만 명 정도이다. 서울에서는 종로 복판에다「기독교 청년회관」을 짓기 시작했다.
교구 통신도『참으로 예수교인들은 아주 능란한 사람들이야』라고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교의 치열한 공격에서 적어도 우리 교우들이 교리상으로나마 그들을 대적할 수 있도록「예수진교사패」란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천주교회에서는 새로운 모델의 학교가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학교의 운영은 그런 대로 교우들의 기부금으로 충당될 수 있었으나 선생을 구하는 일은 극히 어려웠다. 자격을 갖춘 선생은 매우 드물었다. 여기서 교직자 양성이 앞으로 학교 발전에 있어서 불가피한 문제로 등장되었고 따라서 사범학교의 설립이 시급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민 주교는 이 중요한 사업을 위해 일본의「마리아니스트회」에 착안하고 교섭차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 들려온 소식은 매우 희망적이었다.
『6월 13일, 민 주교는 횡항ㆍ동경ㆍ장기에서 마리아니스트들이 경영하고 있는 학교를 시찰했다. 어디서나 주교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마리아니스트들은 신부 수사 할 것 없이 모두가 우리처럼 서울에 학교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또 모두가 이 사업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자기들 의회가 그 창설을 맡게 되었으면 기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후 결정은 이 회의 총장에 달려 있다. 그래서 주교는 곧 총장에게 편지를 낼 것이다. 총장은 지금까지 받은 여러 청을 자금과 회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 교회도 창설에 필요한 일부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이고 또 시초에는 3ㆍ4명 이상의 수사를 청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는 얘기이다.
어쨌든 주교는 한국 교회를 위해 이렇듯 중요한 이 협상이 성공되도록 모든 신부와 교우들의 기도를 바라고 있다』
약 15일 간의 일본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민 주교는 좋은 소식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총장의 회답은『할 수 없습니다』였다. 회원의 부족이 거절의 유일한 이유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