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평온이 되찾아들기 시작하면서 우리 국민 생활에는 현저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본인과 더불어 개화를 향한 출범이었다.
새로운 정치 상황에 대한 현명한 체념이랄까 또는 보다 긴 안목에서의 자주 독립을 향한 장기적인 준비 태세일까. 어쨌든 모두가 새 것을 희구하고 개화에 열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학교와 교육의 문제는 이 시대의 최대의 관심사요 유행이었다. 두메 구석구석에까지 신식학교들이 속속 출현했다. 하지만 개화란 생각보다는 깊은 것이었고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개화경에 개화장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쉽고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와 교육이 현대화 과정에 있어서 천주교는 도저히 예수교를 좇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당시 우리 선교사들은 이 점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나타났다.
평양은 북부 지방에 있어서 예수교 선교사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목사와 여 전도사의 수만 하여도 10여명인데다가 예배당이니 병원, 쾌적한 저택이니 대소학교들, 한 말로 그들은 대중을 끌기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예수교의 학교 수를 본다면 장로교와 감리교를 합쳐서 국민학교 5백 개의 학생 수는 1만여 명이고, 또한 중등학교 22개교의 학생 수는 1천3백 명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우리 신부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도저히 그들과 견줄 수 없다고는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결코 낙심하지를 않았고 학교 신설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이 해에 이(LE MERRE) 신부는 평양에 남녀 학교 각각 1개를 신설할 수 있었고 명(MENG) 신부 관할의 영유 지방에도 이미 5개의 학교가 세워졌다. 또한 삼화의 진남포 신(LEREIDE) 신부는 예수교 학교에서 처럼 체육에 큰 비중을 둠으로써 학생을 모집하는 데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 지방에서 이만큼이라도 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곳 주민들의 열성의 덕택이었다. 이곳 천주교인들은 교육열에 있어서 절대로 외인들에 뒤지지 않았다. 반면에 남부 지방의 교우들은 여전히 舊習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천주교의 학교 수는 1백12개교이고 학생 수는 2천2백47명이었다. 그런데 2개 또는 그 이상의 학교가 소재하던 지방으로서는 종현 약현 제물포 수원 안성 대구 매화동 용인 양지 합열 용안 진안 태인 부안 지도 원주 이천 평강 평양 영유 등을 들 수 있고 장연 자우현 풍수원 죽산 영종도 진천 공세리 서산 합덕 공주 은진 장수 순창 수류 정읍 무안 이주 부산 김천 지산 서흥 재령 등지에도 각각 1개씩의 학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때에 이미 만주의 間島와 吉林 지방에까지 5개 이상의 학교가 있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교회 학교의 초ㆍ중등교육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지방 청년들은 고등교육을 받기 위하여 서울의 정부 학교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황해도에서는 단 하루에 무려 2백여 명이나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이러한 유학 현상에서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이 단연 우세했던 반면에 충청도와 전라도 같은 남부 지방에서는 유학생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서울의 지방 학생 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을 수용할 기숙사의 시설이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종현의 성바오로 수녀원이 제일 먼저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세우고 교구 통신을 통하여 지방 신부들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6월 12일, 오늘 경향신문사가 신설되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스따니슬라 수녀는 이 기회에 기숙사에서 지방 소녀들을 환영한다는 뜻을 모든 선교사와 한국인 신부들에게 전해 달라고 한다. 기숙사비는 한 달에 불과 2원, 그러니 돈이 없어서 학생을 보내지 못할 지방은 없을 것이다. 기숙사에 소녀들을 보내어 장래의 교사를 준비하지 않으시렵니까?』벌써 15명이 들어왔고 10여명이 신청 중이라고 했는데 기숙사에서도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온 학생이 한 명도 없는 것이 이채롭다고 하였다. 남학생을 위한 기숙사는 아직 없었으나 그러나 교회는 적어도 그들이 모여 즐길 수 있는 회관을 마련하는 정도의 아량과 이해는 보였다.『우(Villcmot) 신부는 옛 당가 자리인 주교관 사랑채 옆의 건물을 개조하여 학생들의 집합소로 만들었다. 작은 도서관 오락 도구 장기 등을 마련하여 학생들이 하루의 휴일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主日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다. 서울에 아는 사람이란 전혀 없어서 어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무위도식은 惡의 권고자이다. 이제 그들은 서클을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고 또 동무들을 데려오겠다는 것이다. 예수교는 온갖 방법으로 청년들을 그들 편으로 끌어모으고 있다. 우리도 이젠 무엇인가 해야 한다.
『청년을 갖는 자는 미래를 갖는다』고들 말한다. 이 진리가 오늘의 한국의 현실에서 만큼 더욱 적합한 때가 있었을까!』前年 일본의 마리아니스트와의 교섭에서 거절을 당한 민 주교는 이제 구라파로 가서 어떠한 수도회이든 간에 서울에 초청하여 숙원인 사범학교의 설립과 유지를 맡기려 했다. 민 주교는 로마 빠리ㆍ구밴 간을 몇 차례씩 내왕하면서 수도회란 수도회는 거의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다.
마리아니스트 성모승천수도회 삑부스회 마리스트 무염시태성모헌신회 살레지오회 빈첸시오회 그리스도교 교직자회 등등. 그러나 서로 약속이나 되어 있는 것처럼 한결같이『노우』였다. 한때「살레시아니」가 받아들일 듯했으나 결국은『노우』로 끝났다. 주교는 편지에서『한국에서 성공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한탄스럽고 면목이 없습니다. 신부 피정도 가까웠으니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빈 손으로 돌아갈 수야 있습니까? 이렇게 성공을 못 거두다니 어이 없습니다. 이제 독일의 분도회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귀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그간의 너무나 유감스러웠던 교섭의 경유를 전해 왔다.
마침내 독일 성분도수도회에서『3주 후에 참사회가 열리면 거기서 최후 결정이 내릴 것이다』라는 소식이 왔다. 독일 수사신부들을 서울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모두들 희망에 차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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