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의거는 의거 당일인 10월 26일부터 보도되기 시작한다. 처음엔 伊藤博文을 암살한 자의 성명이 미상이라고 하였으나 곧 천주교인임이 드러났다. 이에 민 주교는 암살자가 천주교인일 수 없다고 신문사에 항의하였다.
■10월 26일 교구통신
『첫 번 전보에 의하면 伊藤이「하루빈」역에서 오전 9시 한국인이 발사한 육혈포 몇 발을 맞았다는 것이고 이어 들어온 전보는 伊藤이 죽어간다는 소식이었고 저녁 9시에 들어온 전보에 의하면 伊藤이 결국 총탄을 맞은 지 30분 만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10월 29일 교구통신
『암살자는 평양 태생에 나이는 24세, 노서아 경찰에 붙잡혔다고 한다. 그는 원산에서「하루빈」으로 갔었다. 아직 그의 이름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신문들은 암살자가 천주교인이고 이미 그는 미국 상항에서의 스티븐스의 암살에도 참여했었다고 대서특필하면서 차제에 천주교를 타도하려 한다. 민 주교는 통감부 신문「서울 프레쓰」에 다음과 같은 반박 성명을 냈다』
『동경으로부터의 전보에 의거하여 몇몇 일본 신문과 한국 신문들이 故 伊藤公을 암살한 한국인이 천주교인이고 또한 미국에서 故 스티븐스씨의 암살에도 관련된 자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보도가 절대적으로 허위 사실임을 주장합니다. 어떠한 천주교인도 일찌기 미국에서 스티븐스씨의 살해에 관여한 일이 없으며 뿐더러 이 나라에서의 여하한 정치적 저항에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종사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곧 암살자의 성명과 신원이 밝혀졌다. 이름은 안응칠이고 천주교인으로서 본명은 도마이다. 뿐더러 안의 음모를 이미 알고 있던 불란서신부들도 있었다.
■10월 29일 교구통신
『「서울 프레쓰」는 伊藤을 가리켜 이국 땅에서 인류와 문명을 위해 희생된 순교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 베드로 사도도 모르고 있을 최초의 시성식일 것이다』
■10월 30일 교구통신
『경찰은 「하루빈」에서 암살의 공범으로 한국인 9명을 체포했다. 진범의 이름은 안응칠이라고 한다』
■11월 3일 교구통신
『한국 및 일본 신문들은 동경발 소식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한다. ①자객의 이름은 안중근 ②그는 여러 번 그의 이름을 바꿨다. ③그는 문도에 있을 때 도마라고 불렀다. ④그는 신천 출생으로 아버지는 태원이다. 이미 3년 이래 고향을 떠나 있었다』
■11월 4일 교구통신
『이날 아침 8시에 민 주교는 통감부를 찾아 적화를 바치고 적의를 표했다. 서울의 불란서 신부들이 동행했으나 한국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출입이 일체 금지되었다』
■11월 5일 교구통신
『안중근과 공범들이 여순으로 이송되었다. 안은 식욕을 전폐하였고 심문을 당할 때 통역을 시켜<나는 천주교인이고 또한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다>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는 슬픔이나 후회의 빛을 보인 적이 없고, 표정과 말, 거동이 다 그가 수행한 임무에 만족을 나타냈다.「하루빈」에서 체포되자 그는<伊藤이 죽었는가>라고 몇 번이고 물었다. 죽었다는 대답을 듣자 그는 큰 소리로<폭군이 이미 죽었음을 천주께 감사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민 주교는 홍(Wilhelm) 신부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안 도마가 청원 등을 떠난 지가 벌써 3년이 되었고 그는 원산으로 갔었다. 백 (Bret) 신부는 홍 신부를 통해서 이 청년의 사상과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906년 8월 15일 축일에 그에게 성사를 거절했다. 백 신부는 안을 공적으로 드러나게 지원함으로써 어떠한 정치적 분규에도 끌려들기를 원하지 않은 때문이다.
그 후 한국의 어떠한 선교사도 그를 본 일이 없다.
그는 3년 동안 단 한 번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으나 주소는 밝히지 않았다. 암살이 미리 계획되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암살 며칠 전에 도마는 친구를 시켜 그의 부인 아녜스와 두 아들을 데려오도록 보냈는데 아마도 그들을 만주에 정착시키려 한 것 같다.
근자의 일본 신문에 의한건대 결국 그의 부인과 아들들은「불라디보스톡」으로 갔다는 것이고 그의 어머니와 두 형제는 아직 진남포에 살고 있다고 한다』
다음 교구통신은 安의 공판, 의거 동기, 여순 감옥에서의 근황, 가족 방문 등을 이렇게 전해 준다.
■11월 13일 교구통신
『재판이 시작되었다. 암살은「블라디보스톡」에서 계획되었고 서울에 관여된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
■11월 30일 교구통신
『安이 자백한 암살의 동기는 대략 아래와 같은데 ①민비의 시해 ②교활과 폭력에 의한 을사보호조약 ③1907년의 소위 정미조약 ④황제의 양위와 군대의 해산 ⑤애국 지사의사살 ⑥법부 페지와 은행의 독점 ⑦동양의 평화 교란과 열강에 대한 사기 등등이다.
■12월 5일 교구통신
『대판 매일의 보도는 이러하다. 안중근은 그의 공범들과는 정반대로 감옥에서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또 그는 그의 소유물을 다 팔아서 동지들의 생계를 보태어 주었다. 그는 암살을 숙고하고 또한 자발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술을 끊었고 한국이 다시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는 한 모금의 술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감옥에서 날마다 기구를 바치고 있고 그의 집에서 상본들을 꺼내어 감옥의 벽에다 붙였다고 한다.
■12월 26일 교구통신
『서울의 신문들이 대판 매일의 기사를 전재했는데 내용인즉 안중근의 형제 시릴로와 요한이 安 도마를 면회한 이야기이다.
安 도마는 처음 그들의 면회를 거절했으나 결국엔 동의하였다. 요한은 어머니가 보낸 고상을 도마에게 전했고 시릴로는 도마더러 죄를 뉘우치고 천주의 심판을 준비하도록 권고하였다. 도마는 매일 기도를 올리며 죽음과 심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의 원수를 죽인 것은 조금도 뉘우치질 않았다. 끝으로 도마는 자기 부인과 자식들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간수들도 자기를 존경으로 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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