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 전년 12월 30일자 지령 220호로서 자진 폐간했다. 총독부의 방침이 일본인의 직접 운영하는 신문이 아니고서는 인가하지를 않았으므로 경향신문도 자진 폐간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특수잡지로 바꾸는 길밖에 없었다. 경향신문이 비록 자진 폐간은 했지만 특수 종교잡지로 존속시키기로 한 것이다. 경향신문은 1906년 10월 19일 창간호를 발간한 이래 주간지로서 약 4년간 존속해온 셈이다. 그런데 경향신문은 발행 시초부터 교우들만을 상대로하는「보감」을 부록으로 내왔었다.
이제 그 부록을 정식 잡지로 승격시키고「경향잡지」로 개명하여 지면도 대폭 늘려서 월 2회 발행키로 한 것이다. 전 경향신문사장 안 신부는 종전의 구독자들에게 급작스런 실망을 주지 않으려는 뜻에서였는지 어쨌든 경향잡지에도 약간의 시사성을 띄게 하려 한 것 같다. 그러나 곧 일본 경찰의 검열에 걸렸다.
◇1월 21일자 교구통신
『경향잡지 다음호에 약간의 시사성을 주려고 몇 가지 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신문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하여 경찰에 불렸다. 요컨대 그런 내용의 잡지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법률 문답」도 삭제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에 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법률 문답」조항을 없이 하도록 강요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존속시키려면 법률에 대한 비판이나 악의 있는 해석은 피하도록 아주 조심해야 할 것이다』
결국 경향잡지에서도「보감」에서처럼「법률문답」이 존속되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불필요한 단서가 꼭 필요했던 것 같다.
『천주십계 중 나라 권리에 순명하라 하신 제4례가 있은즉 이에 대하여 우리 교우들이 다른 사람보다 열심으로 순명하여야 할지라. 이러므로 본잡지가 세속 일을 상관치 아니하나 교형자매가 나라법을 알고 그대로 수행하는 데 편리하게 하는 일이 본목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이런「보감」에서와 같이 요긴한 법이 있으면 법률 문답으로 풀어 게재하겠음』
이해 봄에 독일 성 오띨리안 분도회 대원장이 한국 분도회의 교육 시설을 시찰하기 위하여 내한했다.
◇2월 22일자 교구통신
『성 오띨리안의 대원장 노르베르트 웨베르 주교가 쁠라치도와 보니파시오 신부 및 한국에 임명된 신부 2명과 수사 4명을 대동하고 어제 부산으로부터 서울역에 도착했다. 대원장은 백동 수도원에서 성대한 예식으로 환영받았다. 오늘 아침 대원장이 주교관으로 와 서 주교를 예방했다. 한편 민 주교도 어제 저녁 역에까지 그를 마중나갔었다. 모두가 건강한 모습이었으나 대원장만은 긴 여행으로 약간 지쳐 있어 보였다』
분도회에서는 아직 교사를 건축 중이었으나 교사 양성의 긴급함을 고려하여 임시 교사를 마련하고 사범학교의 첫 강의를 시작했다. 학생은 거의 모두 학교 기숙사에서 기거했다. 분도회는 신자 교사 양성에 있어서 그들의 지적 교육뿐 아니라 윤리 교육에도 한결같이 배려하였다고 한다. 또한 분도회원들은 사범학교 외에도 이 나라 젊은이들의 직업교육의 필요를 절감하여 공업학교를 계획하고 그 준비 단계로 우선 목공소와 철공소를 개설하였다. 한국 청년들에겐 대단한 인기여서 벌서 약 50명이 견습생으로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조선교구 통신에서 이상의 사범 및 공업의 두 학교의 교사 건축이 어떻게 추진되어 갔는가를 대략 추측할 수 있다.
◇3월 21일자 교구통신
『오늘은 성 분도의 축일이다. 주교를 위시하여 서울의 문 안 문 밖의 모든 신부들이 분도수도원 식사에 초대되었다.
수도원의 건축이 다시 시작되었다. 우선 새 목공소를 짓게 될 것이다. 작년에 지은 분관은 학교를 위해서는 너무 좁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목공소로 쓰이게 될 것이다. 토목공사는 임시 성당을 짓기 위해 정지작업은 계속하고 있는데 임시 성당은 현재 신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에 전부 지을 계획이다.
작년에 지은 본관 안의 일 층은 완전히 끝났고 벌써 식당과 주방은 사용하고 있다. 미장이들이 1ㆍ2층에서 일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마루와문과 창은 아직 대부분이 미완성이고 계단 일도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아직 3ㆍ4개월이 걸려야 이 집에 사람이 살 수 있을 것이라. 그러나 신부들의 현재의 숙소가 오는 9월에 사범학교로 사용되게끔 개조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9월 15일字 교구통신
『오늘 사범학교의 입학시험이 있었다. 많은 道에서 23명의 청년이 지원하였다』
◇9월 16일자 교구통신
『9시에 분도회 수도원에서 사범학교의 개교식과 아울러 대미사가 있었다.
안드레아 신부는 교장으로 그리고 카시안 신부는 부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해의 가장 큰 뉴스는 대구교구의 탄생이 아닐 수 없다. 4월 8일 교황이 칙서로써 경상도와 전라도가 대구대목구로 불리게 되었다.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전 경향신문사장 안(Demange) 신부가 임명되었고 그의 성대한 주교 성성식이 6월 11일 삼위일체축일에 서울에서 거행되었다. 조선교구 통신은 이미 5월 17일자로 모든 신부에게 초대장을 보내면서 이날만은 본당을 비워도 무방하다고 하였고 여비는 각자가 부담할 것과 대성당 입장에 필요한 입당권의 필요한 매수 등을 미리 알려 달라고 하였다.
성성식에는 아주 먼저 방의 신부 몇몇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외국인 신부와 한국인 신부가 참석하였다. 성성식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안 주교는 대구로 부임하였고 대구에서는 그들 자신의 주교를 갖게 된 것을 행복하다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구교구의 수많은 신도들로부터 개선적이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장(Vernorel) 신부가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의 대구교구의 교세는 한국 교회 전체의 3분지 1에 해당된다. 신자 수 2만6천 명, 본당 18개, 공소는 390개다. 그리고 대구본당은 1,500명의 신자로 헤아리는 교구에서 가장 크고 가장 번창한 본당이었다. 전라도 남부 일부와 경상도 북부 해변가 일부를 제외하면 복음이 두루 전 지역에 전파되어 있었다. 서울과 대구를 합친 신자의 총수는 76,843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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