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유치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나는 마술가마 때문인 줄로 알았다.
『여보세요, 전화 받았습니다.』
그러자 곧 저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마스씨 수고 많으시죠? 전 체칠리아예요』
나는 알쏭달쏭해졌다. 체칠리아는 유치원 선생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단번에 떠올렸다. 무용으로 세련된 그녀의 몸매도 떠올렸다.
『체칠리아씨가 저에게 전화 걸어올 때가 다 있군요』
『왜요? 저는 전화 못 하나요?』
목소리가 뾰루퉁하다. 나는 가려운 데를 긁히는 기분이 되었다.
『아니 하도 신기해서 그럽니다. 아마 마술가마 때문이겠죠?』
『마술가만 아직 이틀이나 남았잖아요.
토마스씨, 제가 왜 전화를 걸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는 얼른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무슨 용무가 있겠지요 뭘』
『피, 토마스씨는 목석이시군요』
목석이라는 말뜻을 나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의 가슴 한 구석이 뭉쿨해졌다.
『체칠리아씨, 저는 농담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설마 저를 놀리시려는 건 아니겠죠?』
나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다. 수화기를 통해 저쪽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역시 토마스씨는 순진하시군요. 토마스씨, 다름 아니구요 오늘 도착한 가톨릭시보에 토마스씨의 시가 실려 있더군요. 시제가 체칠리아라고 되어 있어서 이렇게 여쭈어보는 거예요』
가톨릭시보는 주간지였다. 매주 토요일쯤에 우편으로 송달되는 가톨릭시보를 그녀는 읽은 모양이다.
나는 지난 주말에 시 한 편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이 활자화 되리라곤 예기치 못했다. 그냥 문화부 측에 들어가서 적당히 만져지고 휴지통에 버려지겠지 여겼다. 그 시가 시보에 실렸다고 들었을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체칠리아의 목소리로서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충격적일 만큼 기뻤다. 나의 시가 전국의 교우들에게 읽힌다는 것 어찌 기쁘지 않을 텐가.
『체칠리아씨 그게 정말이죠? 내 곧 달려갈 테니 그 신문 그대로 갖고 있어요.』
나는 저쪽의 목소리도 기다리지 않고 수화기를 놓았다. 나는 흡사 날아가듯이 유치원으로 향해 달렸다. 가구점과 유치원과의 거리는 육칠백m, 나는 채 삼 분도 안 걸려서 유치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유치원 안은 대단히 어지럽혀져 있었다. 학예 발표회를 위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소품들이 사방 늘렸다.
체칠리아가 함빡 웃는다. 피아노 뚜껑을 열어놓고 있다. 언제 차려 놓았는지 피아노 위에 양과자 종류가 쟁반에 담겨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문을 찾았다. 그녀는 등 뒤로 신문을 감추고 있다가
『보시고 한 턱 내세요.』
하고 나의 손에 들려준다. 나는 얼른 4면을 펼쳤다. 삽화까지 곁들여서 나의 시는 그 한 칸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읽었다. 몇 번이고 읽었다. 그리고는 흐뭇했다.
『토마스씨, 그렇게도 기쁘세요?』
그녀는 연신 미소를 짓는다.
『아마 모를 겁니다. 이 기쁨은 나만이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화들짝 웃었다.
『만약 토마스씨의 시가 현상모집에 당선되었다면 어떻게 될 뻔 했어요』
『그야 졸도를 했겠지요』
『훗훗훗』
그녀는 피아노 건반 위에 두 손을 짚었다. 피아노 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토마스씨 아무튼 축하해요. 저는 토마스씨가 유명한 시인이 되어주길 바래요』
그녀의 목소리가 애정스럽게 들렸다.
나는 그려를 쳐다보았다. 같은 교우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런데 그녀의 얼굴엔 먼 기다림이 나타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저는 꼭 시인이 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름다움을 시에 담아보겠습니다.』
나는 독백처럼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벌써부터 연민을 품고 있었다는 듯 그윽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분신처럼 그녀와 화합해 버렸다.
나의 귀에 나직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마스씨, 젬마보다는 제가 더 좋다고 말해 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꿈길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예전에 몰랐던 그녀의 마음 그리고 그녀는 이같이 어려운 문제를 내게 안겨주고 있잖은가.
나는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오른팔을 잘리겠느냐 왼팔을 잘리겠느냐고 묻는 망나니 앞에 선 것 같았다.
『젬마가 좋은 모양이죠. 그렇죠 토마스씨』
체칠리아의 얼굴에 갑자기 슬픈 빛이 떠돌기 시작했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그녀의 손을 힘껏 쥐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체칠리아씨가 좋습니다. 저는 시를 아는 여성을 원합니다.』
그녀의 얼굴은 금새 활기를 띠었다.
『저는 믿겠어요. 토마스씨의 말씀을 믿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피아노 위에 양과자 접시를 신문지에 몽땅 싸주며
『이 과자 일하시면서 잡숴요』하고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작업 도중이었으므로 기꺼이 받아들었다.
그녀는 다시
『토마스씨 저녁 여덟 시에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하고 약속 시간을 말해 주었다. 나는 나의 심장이 제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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