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포교성과는 찬란하였다. 온 갈릴래아 땅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로 뒤덮였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의 위용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예수의 입에서는 말씀하실 때마다 주옥이 쏟아지고 있었다. 무엇인가 새롭고 격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정치를 꾸미는 자들에는 이런 사람을 무심히 넘길 수가 없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야심을 품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편인지를 알아봐야한다.
당시 사회의 정치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의 제관들이었다. 그들은 중앙에서 자기들의 일에 바빴고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민족문제가 아닌 한 이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예수의 일이 의혹을 끈 것은 사상적인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서연구와 종교문제연구에 몰두하면서 민족전통수호에 골똘하는 민간지도자였다.
그런데 그들은 파리사이 당파를 이루면서 교만하고 허세를 부리며 위선에 빠지고 있었다.
지방회당에는 성서를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율법교사가 있었고 그들은 율법학자들과 한 통속이었다. 갈릴래아 율법교사들은 예수의 일을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에게 보고하였고 그들은 그 진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몇몇이 파견되었다. 이곳저곳에서 설교하며 기적을 행하는 그 예수는 언젠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에서 장사아치들을 마구 내쫓으며 소란을 피우던 자이다. 요주의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군중 속에 끼어 따라다니며 예수의 발언과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결국 예수는 그들과 사상충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복음서는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죄를 용서한다 해서, 둘째 조인들과 어울린다 해서, 셋째 새로운 사상을 퍼뜨린다 해서 넷째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 해서 율법학자들과 충돌했다. 오늘 이야기는 그 첫 번째 충돌사건이다.
며칠 후에 예수께서는 지방전교에서 가파르나움으로 돌아와 어떤 집에 들어가셨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또 무리지어 몰려왔다. 그중에는 율법학자와 율법 교사들도 끼어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데 일은 지붕에서 터졌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문간 베란다에서 군중을 향하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베란다 차양지붕에 구멍이 뚫리면서 병자를 누인 들것침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병자는 중풍병자였으며 스스로 걷지를 못하기 때문에 장정네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병자를 예수께 접촉시키려고 비상수단을 쓴 청년들은 병자의 간곡한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친지였을 것이다.
군중이 놀라는 광경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 속에 끼어든 감시자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병자는 애원하는 눈으로 예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눈에서 신앙을 읽으셨다. 그리고 그를 도와준 청년들의 애덕과 열성을 가상히 여기셨다 그리고 말씀 하셨다. 『내 아들아, 네 죄는 사하여졌다』
예수께서「내 아들」 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흔치않다. 믿음을 가상히 여길 때 이 사랑스러운 말을 쓰셨다. 사도교회시대이 전교자들은 신앙을 얻은 교우들을 아들이라고 불렀다. 신체적 병을 치유 받으러 온 사람에게 영혼의 병을 고쳐주실 때 그 병자는 약간 실망했을 것이다. 이 기사를 쓴 복음사가는 사도교회에서 믿는 사람에게는 더 중요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이렇게 쓴 것이다.
사실 하느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 하느님은 그 이름조차도 들먹일 수 없을 만큼 지성지엄(至聖至嚴) 하신 분인데 감히 『네 죄가 사하여졌다』 고 단언하는가. 율법 학자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한마디였다. 이것은 분명한 신성 모독죄이다. 이말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한 죄목으로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고소하게 된다(사실 예수자신은 한 번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청한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도 죄가 사하여진다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시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논증은 인간적인 이치를 밟아 깨우치신다. 죄는 하느님이 사하고 병은 사람이 고친다. 그러니 전능하신 하느님이 죄를 사하는 것과 사람의 힘으로 병을 고치는 것과를 비교하면 사람이 병 고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이 이치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말 한 마디로 병을 고쳤다면 그것도 이제는 사람이하는 방법이 아니다.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집으로 가라』. 그 병자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나갔다. 모두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사도시대 교회의 교우들은 영성생활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조가 사해지는데 무한한 감격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제부터는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 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사람의 아들(人子) 」이란 말은 예수께서 자신을 호칭하는 첫 번째 이름이며, 이 말은 구약성서 다니엘이 성현시속에서 「사람의 아들」 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는 예언에서 온 말이다(다니7, 13). 예수께서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며 이 사람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주신 것이다. 이 말은 마르꼬복음서에 14번, 마태오에 30번, 루가에 25번, 요한에 13번, 사도행전에 한번, 70인역 성서인용으로 3번, 도합 86번이나 신약성서에 사용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사용하면서 「이 사람」 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며, 수난을 당하고 부활할 것이며, 영광 속에 구름을 타고 다시 올 것임을 가리키고 있었다.「사람의 아들」 은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아들」과 비천하고 고통받는「하느님의 종」임을 동시에 표현하는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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