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화 신부의 후임으로 명(meng) 신부가 경향잡지사 사장이 되었다. 안 신부는 주교로 승진되어 대구교구 초대교구장으로 발령됨으로써 서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 신부는 그때까지 평안도 의주의 본당 신부로 있었다. 그런데 명 신부가 아직 의주에 있을 무렵에 소위 안명근에 의한 寺內 총독의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는데 안중근 의사와 사촌지간인 명근은 공교롭게도 명 신부가 늘 가까이 접촉하던 본당 교우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인지 명 신부는 이 사건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때마침 그는「조선교구 통신문」의 편집까지 겸임하고 있던 터이라 이 지상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꼭 신부들에게 밝히고 싶었던 심정인 듯하다.
소위「백오인 사건」의 고소상을 중심으로 명 신부가 분석한 사건의 전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고소상에 의하건대 소위 寺內 총목 암살 음모사건의 주모자들은 전 매일신보사장 양기탁과 감리교 목사 윤치호 등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1905년에「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그 회의 목적은 대한 백성의 무관심을 각성시키는 한편 일인 통치하에서의 한국민의 반감을 세계 열강에 알리는 데 있었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소위「을사보호 조약」에 조인과 관련된 대신들을 암살하고 더 나아가서 간도에 육군사관학교를 세워서 일본이 열강과 전쟁할 경우에 대한의 독립을 다시 쟁취할 수 있도록 군대를 일으키고 지휘할 수 있는 유능한 장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완용을 자상하고 伊藤마저 사살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대했던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자 합방도 기정사실이 되고 보니 이제야말로 세계 여론을 일으킬 수 있는 일대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寺內 총독의 암살을 계획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1910년 寺內 총독의 평안도 여행 계획이 그 첫 번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그 여행은 예정대로 실시되지 않음으로써 암살 계획은 실패하였다. 다음 기회는 1910년 12월로 예정된 寺內의 의주 여행이었다. 이에 신민회원들은 극비밀리에 회의를 열어 寺內가 통과하는 평양 선천 의주역 등 주요 지점에서 그의 사살을 시도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많은 자객들을 상기 역 구내에 배치시켰다. 12월 27일 기차가 선천역에 도착했으나 寺內는 기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기차가 의주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寺內는 그날 밤을 기차 안에서 지냄으로써 또 다시 암살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안명근이 寺內의 암살을 시도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미연에 발각됨으로서 미수에 그쳤고 체포되어 그 다음 해 7월에 기소되었다. 그 무렵 양기탁도 구속 기소되었다. 1911년 11월에 예정된 압록강교 낙성식에 寺內의 참석이 확실해지자 신민회원들은 이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암살을 계획했으나 아무도 감히 발사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소위 寺內 총독 암살 음모 사건과 관련된 혐의로 구속 기소된 피고인들을 위해 특별히 지은 법정에서 시작되었었다.
피고인들은 거의가 다 청년들이고 또 대부분이 장로와 목사 등 신교도들이었다. 그 중 천주교인도 한 명이 끼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안명근이었다.
이 안명근에 대하여 명 신부는 법정에서 그의 무죄를 증언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안의「알리바이」를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1910년 겨울에 나는 의주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소장이 지적하고 있는 그 며칠동안 안명근은 나와 함께 있었거나 아니면 김 신부와 같이 있었다. 아니면 그는 김 신부가 거처할 집을 물색 중이었다』
安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명 신부는 소망대로 법정에 중인으로 불려 증언할 기회를 가졌으나 그의 증언이 과연 기대한 효과를 냈는지는 심히의심스럽다. 서울교구장 민 주교는 금년 들어 처음으로 서울교구 소속의 최북단인 간도지방 순시에 나섰다. 10월 5일 부산에서 선편을 이용하여 원산 성진 청진을 거쳐 11월 12일 웅기 항구에 도착했다.
웅기서부터는 말을 타고 70리 상거의 훈춘에 이르러 원(Rarribeou) 신부와 최 신부의 환영을 받고 이어 용정으로 가서 남(Curlier) 신부의 환영을 받았다. 귀로는 청진에서 원산까지만 배를 이용하고 철원까지 와서 새로 개통된 기차를 이용할 예정이었으나 훈춘으로가는 도중에 뜻밖의 낙마로 허리를 다친 주교는 부득이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부산을 거쳐 11월 29일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다.
간도지방의 당시 교우 총수는 3,768명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계속 이 지방으로 몰려드는 이민으로 인하여 교우 수도 해마다 크게 불어갔다. 용정의 남 신부는『지난 봄에 평안도와 강원도에서만도 약 30세대가 이민해 왔다. 그들은 고국에서보다는 좀 더 조용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이곳까지 왔으나 그들 중 많은 이가 가난하여 생존 투쟁을 견디어낼지 의심스럽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다시금 복지(?)를 찾아 시베리아 서간도로 떠나간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그칠 줄 모르는 이민병을 염려하였다. 비단 남 신부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선교사들은 우리 한국인의 이민병에 새삼 놀라는 태도였다.
『한국인은 아주 이민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집은 한갖 캠프에 지나지 않은 것 같고 조그만한 구실만 있으면 집을 버리고 다른 지방으로 떠나간다. 만일 그 지방에 다행히 선교사나 교우촌이 있으면 불행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흔히 그들의 모험심은 신부도 교우도 없는 지방에까지 가게 된다. 거기서 곧 그들은 신앙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고국을 떠날 때 그들은 문답과 신공책을 갖고 간다. 그들은 얼마 동안은 신공을 드린다. 하지만 그들은 멀리 있는 신자들과 접촉할 수도 없고 성사도 받을 수 없게 되니 차차 신공을 드리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신앙마저 잃어버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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