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여덟 시는 그렇게 재빨리 다가오지는 않았다. 너무 조급하게 기다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이 정지된 상태에 있든지 하여간 나는 잔뜩 부풀어 있었다. 좀전에 깎아둔 마술가마의 부속품을 재검토해볼 지경으로 나의 마음은 면밀해졌다. 이를테면 마술가마의 형태를 약간 어긋나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최대한의 솜씨를 발휘해 보자는 야망이 가슴 속에서 끓어올랐다. 이것은 체칠리아에게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으므로 나는 이미 깎아둔 목재 중에서 너무 볼품없는 것들 즉 휘어진 것 패인 것들을 가려내고 대신 각구목을 잘라 쓰기로 했다. 이것은 물론 김군과 한바탕 싸우고 제껴놓은 목재였다. 나는 꺼림칙할 것 없었다. 각구목을 세 개나 톱으로 잘랐다. 그리고는 대패로 깎았다. 이미 양과자는 하나씩 깨물어 먹고 있었다.
일은 척척 잘 맞아들어갔다. 좋은 재료는 능률과 솜씨를 더 높여주는지도 몰랐다.
나는 마술가마의 완성 과정을 마치 다른 사람처럼 지켜보며 감탄하곤 했다.
어김없이 시간은 흘렀다. 옆칸에서는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견습공들이 대패 검불을 쓸어 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김군은 예나 다름없이 연탄불에 물바케스를 올려놓고 웃통을 벗어제꼈다. 자식은 스스로 육체미에 감탄하고 있었다.
자식은 이럴 때 주인집 아가씨가 보아준다면 하고 넌지시 창문 밖으로 내다보기도 했다.
나는 오늘만은 과외의 작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제만 해도 직공들이 퇴근한 뒤 한 시간 가량 더 일했던 것이다.
연장들을 대충 정돈했다. 견습공들은 나의 일칸 청소는 안 돌봐주는 게 습관화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온 종일 일에 지쳤으리란 생각에서 내 스스로 일칸을 치웠던 것이다.
나는 낮에 더럽혀진 밑바닥의 재 부스레기들을 쓸어내었다. 일칸에 설치된 건 전등뿐이었다. 소켓을 들자 불이 켜졌다. 일칸 안이 환해졌다. 나는 수돗물을 한 대야 가득 떠 왔다. 그리고는 대충 세수를 끝내었다. 타올로 닦으면서 나는 대패 다이 위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저녁기도를 드렸다.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옆칸의 직공들 그리고 칠칸의 직공들까지 도시락을 챙겨 들고 공장 밖으로 나간다.
나는 그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 다음 회장님께 가불을 좀 할 작정이었다. 여덟 시의 약속을 위해서 나는 웬만큼은 지니고 있어야 될 것 같았다. 낮에 그토록 다투고도 가불을 해줄지 걱정이 되긴 했다.
나는 일칸에서 나왔다. 마당 하나를 사이로 회장님의 살림집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댓돌 위에 신발들이 보였다. 텔레비젼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들이 단조롭게 들려왔다.
나는 방문 앞에 다가가서 나직히 불렀다.
『회장님 저 좀 봐요.』
문이 드르르 열린다. 젬마가 나왔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게 명랑해져 있었다.
『토마스씨, 방에 좀 들어오세요.』
그녀는 대뜸 나의 팔을 끌었다.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금방 포근한 마음이 되었다.
나는 여덟 시의 약속을 거짓말처럼 잊어버렸다.
방에 들어갔다. 텔레비젼의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공원 벤치에 앉은 청춘 남녀의 키쓰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집안 식구들이 하나둘 나가버린다. 종래에는 그녀와 나만 남겨졌다.
그녀는 내게 뭔가를 집어 주었다. 카라멜이었다. 나는 포장을 벗기고 입에 넣었다.
그녀는 자꾸만 나를 쳐다본다.
나는 태연해지려고 애썼다. 나는 나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분수를 못 차리고 그녀를 껴안아 버릴 경우 드르르 문이 열리며 회장님이라도 들이닥치면 나는 큰 낭패인 것이다. 나는 이런 낭패를 가장 큰 불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 말이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입을 꼭 닫은 채 카라멜을 씹었다. 눈은 텔레비젼에 부착시킨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안타까웠든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를 좀 차려 달라고 해 보세요.』
나는 낮에 있었던 일로 그녀의 동정은 죽어도 싫었다.
나는 거절했다.
『집에가면 밥이 있습니다.』
그녀는 입이 삐쭉해진다.
『누가 토마스씨 집에 밥 없다고 했나요. 시장하지 않으세요?』
나는 그녀가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한다고 생각되었다.
나도 여기에 응수했다.
『저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일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더 얘기할 수가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 카라멜이나 많이 잡수세요.』
나의 손에는 카라멜이 봉지째로 들려졌다.
그녀는 몹시 피로한 듯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녀가 울어버릴 것 같이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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