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그것이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죽음이란 것을 슬프게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실감케 한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입원하신 지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다시 회복했으면···』 하는 희망으로 가슴을 조였다. 주위 여러 선생님들과 가족들의 원의와는 달리 병세는 악화일로다. 평생에 못다한 효도를 하느라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에는 오고야 말 시간이 가까워왔다.『오늘 밤이 고빕니다. 아마 밤을 못 넘길 것 같습니다.』하는 의사의 말이 가혹하기만 했다. 평생을 신앙과 교회를 떠나서는 살지 않았고 항상 착한 분이라는 것을 느껴는 왔다. 그러나 막상 귓속말로 미안한 듯이 전해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다시 병실에 들어섰을 때는 불쌍하기만 했다.
산소 호흡기로 숨을 쉬고 팔에는 링거로 주사 바늘이 무자비하게 꽂혀 있다. 평소에 쓰시던 묵주 돋보기가 탁자 위에 놓여 있고 평생을 애독하시던 준주성범이 낡을 대로 낡아 손때가 묻어 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영원히 이 세상에서는 사라질 것도 모르시고 주무시는지 아니면 눈만 감고계시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조용히 침대 옆에 고르지 못한 맥을 짚고 있었다. 평생을 착하게만 사시려 했고 퍽도 애를 쓰시더니 이제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무 말씀이 없다. 둘러있는 사람들의 조용한 이야기 소리에 힘없이 눈을 뜨신다.『왜, 가서 저녁 먹지. 나는 괜찮다.』하시며 둘러보신다. 나는 이때다 하고 다른 사람들을 다 보내고 수녀 누이와 아버지께 말을 걸었다. 이것이 살아계실 동안의 마지막 효도라 생각하고 용기를 냈다.『아버지 만일 돌아가시면 어쩝니까. 우리한테 하실 말씀이라도…』하고 나는 목이 메었다. 눈을 가만히 뜨시더니『내가 할 말이 있나, 항상 말했듯이 착하게 살아야지, 순명하고 기도하고···형제끼리 화목하고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면 되지 할 말 없다.』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해도 놀라지도 흐트러지시도 않는 것을 보고 오히려 내가 마지막 위로를 받았다. 시간이 지난다. 다시 원장님 간호원들이 들어왔다.우연히 볼일 보러 대구에 왔던 큰누님까지 자식들이 전부 침대를 둘러쌌다. 그리고 수녀 누님이『아버지 기도해요』하며『예수 마리아 나를 구하소서』를 거듭했다. 세 번 같이 따라하시다가 힘이 드시는지 입술만 움직인다. 그러다가 그마저 부동으로 의사가 맥을 짚고 나는 눈을 감겨 드렸다. 수녀 누님은 아랫턱을 아무려 드렸다. 일 초 일 초 한참이 지나서 원장님은『이제 끝났습니다』하고 눈으로 말씀하셨다. 파란 많던 일생이 끝난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죽음인가, 이렇게 조용한가, 이렇게 평화스런 건가. 모를 일이다. 죽음은 고통스럽다던데 두렵고 겁나는 거라던데 슬프고 온통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던데 이게 무슨 죽음인고 하고.
이런 얘기를 하며 예비자 교리 때 왜 교회를 찾았는지에 대해 예비 신자들에게 물어봤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내가 교회를 찾은 것은 죽을 때 평화스럽게 죽고 싶어서입니다.』 고 말했다.
이유는 이렇다. 자기가 가장 존경하던 덕망 높고 이름 있는 분이 죽어갈 때 평소의 의젓했던 그 덕망 있던 모습은 간곳없고 이마에는 비지땀을 흘리고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쥐고 고함을 지르며 『내가 왜 죽어, 나는 산다. 나는 산다.』하고 소리 지르는 것을 보았단다. 그리고 실망한 나머지 죽음을 이기는 힘이 무엇일까 하고 교회를 찾았단다.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나는 위 두 사람의 죽음을 알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다.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다. 영생으로의 관문, 바로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관문을 통하기 어려워서다. 아니면 세상 사람이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그 관문이 영벌의 관문이 될까봐 그러는 것이다. 신념 없은 삶 바로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을 무섭게 만드는 것이다. 신념 없는 삶, 그것은 향기 없는 꽃이요 영광 없은 경주와 같은 것이다. 생명은 죽음과 직결돼 있고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진다고 생각되기 쉽다. 그래서 삶은 살수록 수명을 줄인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현세적 삶은 오래될수록 영생으로 가까와지는 것이고 영생의 첫 걸음은 죽음에서 시작된다. 현세를 즐겁게만 살려는 사람들은 죽음이 무섭다. 인생을 엔조이만 하려는 사람들은 죽음이 괴롭게 생각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비참하고 슬픈 것이다. 죽음은 비애스런 것이고 인생의 전부를 앗아가는 괴물과 같은 것이다. 때로는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이 몰고 오는 수반된 것들이 사람을 더 괴롭힌다.
병실 탁자 위에 낡은 준주성범이 아버지의 죽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주님의 가름침대로 살다가 주님과 같이 부활하실 아버지의 죽음이 어찌 영광된 죽음이 아니겠는가. 죽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를 얻는다. 즉 영원한 생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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