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도 만주로 가는 이민의 대열이 그치질 않았다. 아니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는 추세였다. 몇몇 본당 신부들의 보고에 의하건대 원산에서 50여명, 평안도 안변에서 1백 명, 황해도 신계 지방에서 30세대가 떠나버렸다고 한다. 또한 용소막과 평안도 영유에서 이민으로 각각 17명과 15명의 교우를 잃었다는것 이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북간도로 갔는데 개중엔 서간도로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금년에도 서울교구의 대인 영세자가 5천여 명이나 되고 게다가 사망자보다는 출생자의 수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교우 수가 증가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감소되어가고 있음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이민이 그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지적한 민 주교는 한국민의 이민병을 이같이 개탄한다.
『한국 사람은 그 이민적이고 변동적인 정신 때문에 자기 나라에서 겪는 어려움 앞에 즉시 실망하고 행운을 찾아 봇짐을 싼다. 제 멋대로 사는 데 익숙된 한국인은 경찰이나 기타 규정을 체념하지 못하고 그 귀찮은 제재를 피해 떠난다. 평야에 정착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생활의 여유를 얻게 되는 반면에 산악지방에 정착한 사람들은 흔히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에 놓인다. 몇 년만 참으면 될 터인데도 또 떠나버린다』
대구교구의 안 주교도 이 같은 이민성은 그들 조상들의 유랑성에서 많이 영향 받은 한국인의 여행적 기질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다. 사내 총독의 암살 음모의 혐의로 기소된「백오인 사건」의 공판은 금년에도 계속되었다.
이 통신문의 편집책인 명 신부는 일찍이 의주본당 신부였다는 인연으로 해서 여전히 의주 교우인 피고인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피고인의 요구에 의하여 마침내 의주로부터 회장 1명이 상경하여 법정에 출두했다.
■2월 19일字 교구 통신
『피고인 이게당(漢字未詳)을 위한 증언을 하기 위해 의주로부터 증인이 도착했다. 이 의주 교우는 음모사건과 관련되어 기소되었는데 지난 여름에 있은 그의 첫 번 공판을 보도한 바 있다. 그때 그의 변호사는 나더러 증언하기를 청했으나 법정이 모든 증언을 거부했으므로 결국 증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런데「JAPANCHRONICLE」의 보도에 의하면 피고나 1910년 12월 25일 당일과 그 후 3일간 의주에 부재했다는 증언을 해줄 수 있도록 자기 소속본당 신부의 증언을 두 번이나 간청했을 것이라고 한다. 성탄 날 신부가 피고의 공소인 비현에 미사를 드리려 왔었고 그 후 3일 간도 피고는 교회 일로 아주 바빴다는 구실을 들고 있다』명 신부는 피고의 이와 같은 주장이 사실이었음을 시인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12월 25일 김 요셉 신부는 비현에 갔었고 다음날 출발에 앞서 김 신부가 장래 거처할 대지와 집을 물색할 임무를 이게당에게 맡기고 의주로 돌아왔다. 이는 즉시 활동하기 시작했고 30일에 내게 편지를 보내어 집을 구했다고 전해왔다. 31일부터 매매 계약의 사전 교섭이 시작되었고 우선 15일 후에 4백 원을 지불할 것이 약속되었다.
그러므로 이가 이 일에 전적으로 종사하면서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80리 거리나 되는 의주에 와 있었다고 믿기는 아주 어렵다.
이제 항소심에서 증언의 청취가 허락되었으므로 김 신부나 아니면 내가 법정에 출동할 것 같다. 그러나 법정은 서양인의 출두를 기어코 피하려했으므로 결국 회장이 불린 것이다. 이번엔 일이 공정히 판결되길 바란다』
지난 호에서 백오인 중 유일한 천주교인이 안명근이라고 했으나 실은 명근이가 아니고 이게당인 것이 이 해 통신문에서 명백해졌다.
전년 통신문에는 백오인 중의 천주교도가 한 명 포함되어 있다고 했을 뿐 이름을 대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안명근이라고 말한 것은 다만 필자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여순감옥에서 홍석구 신부가 안명근을 책망한 말에서 명근도 천주교 신자였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른바「백오인 사건」에 적어도 2명의 천주교인이 끼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홍 신부는 안중근이가『왜 내 가르침을 배반했는가』하고 책망하면서 참회를 권고해마지 않았다.
『만약 네가 그때 내 말을 들었다면 오늘 이처럼 오랏줄에 묶이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보아라, 네 도제 안명근을! 그는「하루빈」의 소식을 듣자 당황하여 나에게 와서<범인이 누구인지 아는가>하고 묻기에 나는 즉석에서<네가 했을 거다>하니 명근은<맞았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중근과 같은 생각을 품었으나 다행히 신부님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에 오늘 이처럼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중근과 함께 여순감옥에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하고 나에게 고마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너는 이 말을 듣고 과연 어떤 느낌이 드느냐』
유명한 이 사건의 최종 공판 선고가 10월 9일에 있었다. 105명 중 윤치호 등 6명만이 유죄 선고를 받았고 나머지 98명은 무죄로 선고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게당이 포함되었다.
백동 성분도회 수도원 원장 보니파시오 신부가 이 해에 대원장(Abbas)으로 승진하였다. 마침 회의 참석차 독일로 떠났던 그는 6월 8일 독일 성 오띨리안 본원에서 성성식을 가진 후 12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편 분도회 신부들이 경영하는 학교 중에서 실업학교는 계속 번창하고 지원자도 많았으나 사범학교는 그렇지가 못하여 일단 강의를 중지하고 원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돌연 강의를 다시 시작하라는 내용의 전보가 독일 본원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개학일을 10월 1일로 정하고 지원자를 모집했다.
그러나 4명의 지원자밖에 없었으므로 부득이 학교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성 분도회는 민 주교의 초청으로 내한하여 주교의 소원대로 사범학교를 세워 교사난에 허덕이는 한국 교회를 위해 유능한 신자 선생을 양성하려 했으나 뜻밖에 지원자 부족이란 특수한 난관에 부딪쳐 끝내 2년간 존속한 끝에 학교 문을 닫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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