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러시아에 이어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한국 프랑스 선교사들의 화제는 전쟁과 예비병 소집에 관한 얘기로 집중한다.『누가 소집되어 떠났다』『이번엔 내 차례이다』『누구는 소집되었다가 되돌아왔다』『중국의 선교사들과 비교하면 일본과 한국의 선교사들의 소집 규정이 좀 불공평하다』등등. 사실 이러한 불평과 불만에도 일리는 있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정부 자신이 처음엔 소집에 관한 명확한 규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서울교구에서 젊은 프랑스 신부 11명이 소집되었다. 이러한 급작스런 소집으로 서울교구는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된다.
이제 한국의 프랑스 신부들이 소집되어 나가는 경위를 통신문에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8월 3일자 교구 통신
『전쟁이다. 하느님, 프랑스를 보호해 주시기를! 안 주교가 상경하다』
■8월 9일자 교구 통신
『어제 저녁 3명이 떠났다. 이번엔 우리 신부들 차례다. 명(Meng) 유(Devred) 신(Lereide) 길(Guillot) 오(Boulo) 등 5명의 신부가 일본 문호로 가서 소집병을 위해 특파된 기선을 탈 것이다』
■8월 11일자 교구 통신
『오늘 아침 백(Perrin) 신부가 떠났다.』
■8월 12일자 교구 통신
『오늘은 양(Jaugey)과 황(Rouvelet) 두 신부의 차례다. 9시 기차로 떠났다. 좀 늦게 도착한 표(Poyaud) 신부가 저녁차로 떠났다. 원(Larribeau)신부는 아마도 만주의 우리 신부들과 행동을 같이할 것 같다. 육(Lucas) 신부는 전쟁에 불적합하다는 의사의 진단으로 면제되었다. 용산신학교서는 신입생을 받지 않을 것이다. 또 분관의 신축 공사도 중단할 생각까지 했으나 금년엔 전 공사비의 반액으로 만족하겠다는 청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공사를 계속키로 했다』
■8월 13일자 교구 통신
『차(Chabot) 신부와 운산 광산의 佛人들이 큰 비로 교통이 중단되어 3일간 평양에 갇히었다가 오늘 아침에야 도착했는데 저녁 문호로 떠날 것이다.「아마조네」호는 아직 정박 중이다.』
■8월 14일자 교구 통신
『경(Krempff) 신(Polly) 맹(Mialon) 세 신부가 밤 급행으로 떠났다.』
■8월 17일자 교구 통신
『14번째 출발이다.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임(Bouillon) 신부가 저녁에 떠났다. 예비병에 들어 있는 신부로서는 손(Bouyssou). 공(Gombert). 노(Rouquette) 등이 아직 남아 있다. 제발 그들만은 소집이 안 되었으면! 이제 우리 교구는 얼마동안 상당한 혼란을 면치 못할 것이다.』
■8월 21일자 교구 통신
『기선「아마조네」호가 어제서야 상해를 향해 문호를 출항했다. 대구의 백(Pescbel) 신부가 소집상의 착오로 대구로 돌아왔다. 원 신부도 면제되어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길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8월 29일자 교구 통신
『상해에 이르러 새 지령의 덕택으로 맹 신부가 돌아오게 되었다.』
■8월 31일자 교구 통신
『또 새 지령에 의하여 香港에서 임 신부가 면제되었다.』
■9월 28일자 교구 통신
『대구 신부들이 모두 돌아왔다는 놀랍고도 즐거운 소식이다. 香港에서 실시된 신체검사에서 대구 신부들은 모두 떨어졌고 서울교구의 임ㆍ표 두 신부도 떨어져서 돌아오는 중이라고 한다.
서울교구는 뜻밖의 많은 소집으로 공석이 된 본당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미봉적인 인사 조처를 했다.』
■9월 14일자 교구 통신
『원 신부가 합덕으로 갔다. 그는 경 신부와 신 신부의 지방도 맡아볼 것이다. 진남포 지방의 공소들은 이웃 본당으로 분배될 것이고 매 신부는 매화동을 육 신부는 노 신부 지방을 표 신부는 육 신부 지방을 각각 맡게 되고 지 신부는 원주로 다시 가게 되었다. 공주 지방은 이 요셉 신부가 그리고 수원과 하우고개 지방은 강말구 김 아오스딩 정 레오 신부들이 책임지게 될 것이다.
한편 일본과 한국 지방의 소집병을 태운「아마조네」호는 9월 29일「마르세이유」항구에 도착했다. 소집된 신부들이 수시로 전해주는 소식은 그때마다 편지로 통신문에 실렸다. 용산신학교는 무엇보다도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교수신부 3인 중 2명이 소집되고 보니 진 신부만이 홀로 남아 모든 강의를 도맡아야 했다. 벌써 이것만으로도 일이 과도하다고 생각되어 금년에는 신입생을 받지 않기로 했다.
한편 금년에 새로 시작한 대구의 성유스띠노 신학교에는 설상가상으로 난관이 겹쳤다. 서울서 내려온 신학생 외에 신입생도 받게 되어 신학생 총수는 59명. 평상시라도 새 교구로서 그들을 부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전쟁마저 일어나서 교구장의 고통은 어떠하였으랴. 그러나 안 주교는 그럴수록 하느님께 의뢰하였다.』
『이같이 많은 식구를 받은 것이 경솔한 행위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천주님이 허락하셨다면 그분도 계획이 있어서일 것이다. 10여년 후에 우리가 거둘 수확은 구라파에서의 성소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미리 준비하신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순감옥의 안중근을 방문함으로써 교구 내에 큰 물의를 일으킨 홍석구 신부가 결국 동료신부들에 의하여 축출되다시피 한 사실은 아마도 이 해의 기록으론 남아야 할 사건일 것이다.
민 주교는 교회가 더 이상 정치적 사건에 끌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지 어쨌든 홍 신부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홍 신부는 安도마로 하여금 살인죄를 참회시키고 그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성직자의 본연의 사명이라는 굳은 신념에서 여순감옥을 찾아 도마에게 최후의 성사를 주었다. 여순에서 돌아온 홍 신부에게 민 주교는 항명했다 하여 성사 집행을 금지했다. 이에 홍 신부는「로마」포교성성 장관에게 상소했다. 이에 대하여 포교성성 장관은 1913년 7월에 민 주교에게 이렇게 회답하였다.『여순에 가는 허락을 거부하고 또한 그 신부에게 성사 집행을 금지한 당신의 처사 이유는 보통 이상으로 엄했다고 생각합니다』안중근 사건에서 비롯된 교구장과 신부 그리고 신부들 상호간의 불복과 분열은 좀처럼 평온을 되찾기가 어려워졌을 뿐더러 사회적인 스캔달의 유발마저 염려되었으므로 서울교구 당국은 홍 신부를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조건하에 그를 귀국시키기로 했다.
홍 신부는 귀국 길에 香港에서 안봉근(요한)을 데리고 독일로 갔다. 봉근은 중근의 사촌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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