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12월 1일 저녁「사하라」사막의 중심부에 자리잡은「타만라셋」마을에서 샤를르 드 후꼬는 선종했다.
가까이 지내던 한 이웃에게 배반당하여 자기 은수처 밖으로 목 졸라 메인 채 총살을 당했다. 은수처를 약탈하는 동안 후꼬를 감시하던 15세의 소년이 갑자기 울려온 경보에 놀라 총을 쏘았던 것이다.
후꼬는 그를 형으로 삼고 따르던「타만라셋」의 뚜아랙이라는 가난한 유목민들의 생활을 10여년 전부터 같이 나누어왔다.
샤를르 드 후꼬는 1858년에 프랑스의 한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16세까지는 열성 있는 종교생활을 하였으나 그 후 곧장 세속적인 쾌락에 이끌린 결과 신앙을 잃게 되었다.
1878년에 직업군인으로서 장교가 되었으나 규율이 없고 행실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장교 생활 3년 후 휴직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두 달 후에 그의 동료였던 장교들이 북아프리카 원정을 떠난다는 소식에 후꼬는 자신을 떨쳐버리고 원정에 가담할 것을 신청하게 되었다. 위험과 고초도 견디어냈다. 이제부터 후꼬는 쾌락을 찾기에 급급한 젊은이는 아니었다.
그는 회교도의 아프리카를 발견하였고 거기에 매혹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절대 금단의 지역으로 알려진 모로코를 탐험해 보기로 하고 아랍어를 공부한 후 걸식하는 유태인으로 가장하여 일 년 동안 그곳을 여행하였다. 누추한 옷을 걸치고 위험과 멸시를 자초한 나머지 스스로가 과거의 안일한 생활에서 좀 더 엄격한 생활로 바꾸어 나갈 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더구나 후꼬는 모로코에서 회교도들과 접촉함으로서 하느님의 현존에 휩싸여 살아가는 이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앙을 송두리채 잃은 그에게는 회교도들의 신앙을 그 자신이 확인한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본국에 귀환한 후꼬는 그의 탐험 보고서 출판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무렵「빠리」시내를 혼자 거닐면서 때때로 성당 안에 들어가곤 하였다.
그것은 그가 회교 신앙인과의 접촉에서 어렴풋이 느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는 이같이 기도하기도 했다.
『주여, 만일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나에게 당신이 계심을 알게 해 주소서』
사려 깊은 그의 사촌누이 마리아의 인도로 후꼬는 학덕이 높은 휘불랭 신부를 알게 되었다.
1886년 10월 말 어느 날 새벽에 후꼬는 성당으로 휘불랭 신부를 찾아갔다.
『신부님, 저는 신앙이 없지만 신부님께 교리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왔습니다』휘불랭 신부는 후꼬와 종교에 대한 토론을 펼 때가 아님을 즉시 감지하였다.
『무릎을 꿇고 고백하세요. 그러면 믿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부님, 고백하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세요』
12년 전부터 신앙을 잃었던 후꼬는 마침내 고백성사를 받았다. 고백 후 휘불랭 신부는 그에게 성체를 모시게 했다. 후꼬는 하느님을 다시 찾게되었으며 그 순간부터 작정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 후 3년 동안 휘불랭 신부의 지도하에 예수님을, 그분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모든 것에서 동반하는 반려자가 될 수 있는 수도원을 찾았다. 드디어 후꼬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 수도원의 가난한 생활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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