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은 벌써 어두워졌다. 겨울 밤은 어둠의 농도가 더 짙었다. 하늘에서 별의 소리가 들릴 만큼 주위는 어둡고 조용했다. 어둠 속으로 성당의 우람한 건물이 이국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팔목시계가 정각 여덟 시를 알릴 때까지 자신의 옷차림 용모 따위를 돌보았다. 그리고 여덟 시가 되었을 땐 놀라우리 만치 날씬해져 있었다.
그녀는 팔과 다리를 부드럽게 뻗쳐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아주 율동적으로 짜여진 것 같았다. 어떠한 음악에라도 맞춰서 춤출 수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남자의 품에 안기려고 하는 그녀 자신의 강한 욕망이 하나의 커다란 형상을 이루어 포물선을 그었다.
그녀는 토마스의 가슴이 한없이 넓은 바다와도 같이 상상되었다. 그 바다에 가라앉은 하얀 구름 덩어리를 그녀는 상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토마스가 유명한 시인이 되리라는 희망에 넘쳐 있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듯이 느껴졌다.
그녀는 토마스의 시를 암송해 봤다.
시어의 감미로움이 포근한 침대처럼 그녀의 전신을 눕혀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두 팔로 젖가슴을 쌌다. 풍만함이 짜릿한 쾌감조차 일으킨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뽑았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여덟 시 십 분이었다.
그녀는 뭐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았다. 토마스가 약속 시간을 까먹을 리는 없잖은가. 설령 까먹었다 해도 곧 생각날 것이 아닌가.
그녀는 초조해지는 가슴을 느꼈다.
토마스가 약속을 어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 자신이 이토록 토마스를 기다리고 있는 이상에는 이 같은 사실이 원점을 이탈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손지갑에 웬만큼의 돈도 갖고 있었다. 토마스에게 원고지와 만년필을 사주려고 비밀히 감춰둔 돈을 꺼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꾸만 바깥을 내다봤다. 묵직한 어둠밖에는 보이는 게 없다. 그 어둠 속에서 토마스가 걸어오고 있다고 가상해 보자. 그녀는 단숨에 달려 나가서 토마스의 품에 뛰어들었으리라. 그리고는 기다렸어요 하고 속삭였으리라. 그러나 나타나지 않는 토마스. 그녀는 전신의 힘이 쭉 빠져버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대들이 푸석푸석 소리를 내고 무너져갔다. 그녀는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졸지에 몸을 지탱하고 섰기도 힘겨워졌다.
그녀는 극의 지점에 몰아부치면 어쩔 수 없이 부르짖게 되는 주님의 도움을 빌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시간은 몹시 흘러 아홉시가 가까워졌다. 그녀는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엇에 속은 것처럼 분하고 서러웠다.
그녀는 토마스가 약속을 어겼다고 확신해 버렸다. 토마스는 이미 다른 사람의 토마스가 되어 있다고 그녀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젬마의모습과 함께 토마스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장시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멍청해져 버렸다. 뜨겁게 아주 뜨겁게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이 마침내 그녀의 눈에서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 울다가 그녀는 현관문을 잠그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행여나 하고 한 번 더 바깥을 내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토마스의 분신처럼 한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의심해 봤다. 또렷이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그녀는 외치고 싶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체칠리아 여태 안 갔니?』
요한나 수녀님이 유치원에 불이 켜져 있음을 보고 나온 것이었다.
체칠리아는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울먹이는 소리를 내었다.
『녜. 이제 가려던 참이었어요』
요한나 수녀님은 체칠리아의 동태가 심상찮음을 단번에 눈치챘다.
『체칠리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요한나 수녀님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녀는 더 숨길 수가 없어졌다. 목구멍까지 참았던 울음보가 그만 터뜨려져 내린 것이다.
요한나 수녀님은 체칠리아의 얘기를 다 들은 다음
『체칠리아가 나는 부럽군. 나 같은 자는 이제 약속이란 것도 있을 수 없으니 말야』
『형. 전화 받아요』
명구가 칸막이 문을 반쯤 열고 알려준다. 나는 마술가마를 완성시켰으며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마술가마를 만드는 동안 많은 다툼이 있었고 굉장한 추위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나의 사본대로 마술가마에 산호 조각을 장식하였다. 이러고 보니 연방 숲 속의 요정들이 튀어나와 마술가마를 떼매고 달아나버릴 것만 같았다.
회장님은 나의 고집이 결코 악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점을 미루어서 간섭하기를 그쳤으며 김군 역시 마술가마를 만들기 위해 바치는 나의 온갖 열의와 노고를 보고는 침묵을 지켜주었다.
다만 가끔씩 내게 상관한 사람은 젬마였다. 그녀는 나와 한바탕씩 언쟁을 벌이는 걸 무슨 영문인지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즐거워하는 게 이상스럽긴 했지만 깊이 묻고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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