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사해준다 해서 일어났던 첫 번째 충돌은 유대아인 지도자들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 못마땅해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충돌은 외부로 드러났다. 죄를 사한다는 신성모독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사람들이 율법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을 때는 드러내놓고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파르나움의 집을 나서서 해변가로 나아가셨다. 이 해변가는 이미 예수님께 친숙한 장소이다. 여기는 어부들이 열심히 일하는 곳이고, 어부들이 열심히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광경은 하느님 나라의 일꾼들이 사람들을 이 나라로 불러들이는 광경을 연상케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물고기 떼처럼 예수님을 따라왔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예수님은 언제나 하느님나라에 관해 설교를 하시며 가르치신다. 오늘의 주제는 버림받은 자에게 하느님나라의 문은 열려 있다는 새로운 복음이다.
예수께서 설교하시던 해안에는 로마인들이 세워놓은 세관이 있다. 이곳은 외국상인들이 드나들고, 유대아인 상인들이 물건을 밖에 내다 팔려면 이곳을 지나야 한다. 세관에 앉아있는 세리는 로마인들을 위하여 그 상품에 관세를 물리는 것이다.
유대아인들은 종교세로서 성전세와 십일조세를 물어야 했고 로마인들에게 거주세ㆍ인주세ㆍ재산세를 직접세로 내야했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상품을 가지고 옮겨 다닐 때마다 간접세로써 관세를 물어야 했다.
이 관세를 받는 하급 세리는 상급세관과 계약을 맺고 일정액을 미리 물고 그만한 투자를 감안하여 관세를 부과하고 받아내는 일종의 관세청부업자였다. 이 세리들은 보통 로마인들이지만 유대아인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대아인은 자기 동족들의 눈에는 더럽고 치사한 민족반역자다. 세금을 장사하는 이런 따위의 세리는 민족적으로 배격당할 자이며 윤리적으로 경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세리의 권리를 따는 것은 여간 재주가 없으면 하기 힘든 수지맞는 직업이다. 레위라고 이름하는 유대아인 한 사람이 갈리래아 바다가 세관에 앉아있었다.
마태오 복음서를 쓴 장본인은 그 레위가 바로 자기라고 명시하고 있다.
마르꼬와 루가는 마태오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사도교회시대의 교우들에게 사도 마태오가 그 세리였다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마태오 자신은 자기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었다는 신상발언을 한 셈이다. 하여튼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손짓하셨다.
뭇 사람의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예수께서 제자들은 선택하시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먼저번 네 제자들은 어부였다. 흙투성이의 발과 비린내 나는 손으로 사람들과 떨어져 일하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악수조차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다섯 번째로 택한 제자는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인 세리이다.
그러나 마태오라는 세리는 속살이 하느님 눈에 들었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마태오는 군소리 없이 부르심에 따랐고 가파르나움의 자기 집에서 축하연까지 베풀었다. 거기에는 동료세리들과 많은 죄인들이 참석하였고 예수와 그 제자들은 이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였다.
여기서 죄인들이라는 것은 유대아인들이 죄인으로 공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자, 이방인들과 사귀는자, 매춘부들을 가리킨다. 이런자들과 식사를 같이하는 것은 확실히 반율법행위이다. 그들의 식사자체가 종교예절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이 곧 종교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분개를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종교적으로 더럽혀지는 행위이다. 율법주의에 찌들어 있던 그들은 예수가 전개시키려는 하느님나라의 성격을 알리가 없었다. 그 나라는 어느 특종 부류의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마음을 돌려 회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시민자격을 얻게 되는 그런 나라이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고마울 리가 없지만 병자들에게는 의사가 얼마나 필요한지는 누구나 다 아는 이치이다. 예수는 바로 이와 같은 이치여서 죄인이 필요로 하는 구세주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남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스스로는 의인의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 바리사이파인들은 구세주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는 죄인들을 구하러왔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다」「내가 왔다」이 말투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성격을 드러내는 성서용어이다. 앞으로 사도들에게는 「내가 너희를 보낸다」라는 파견의 말로 대조를 이루게 될 것이고 「내가 다시 올 것이다」라는 말로 구세사를 완성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법은 율법이 아니고 사랑의 법이다. 이것은 이미 호세예언서에 알려져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상기시킨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제물이 아니고 자비이다(호세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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