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선교사를 파견하심에 관하여 복음사가들은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마르꼬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말씀하시길『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마르꼬 16:15─16) 또 마태오는 조금 다르게 나타내길『그러므로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경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시오』(마태오 28:19─20) 한편 루까는 사도행전에서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다.『그러나 성령이 당신들에게 오시면 당신들은 힘을 받아「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사도행전 1:8)
그러나 위의 세 가지 다른 표현들은 서로를 비추고 서로를 설명하고 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라 함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널리 알리는 설교 자체이고『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함은 설교의 효력(그리스도의 제자 즉 그리스도와 같이 생각하고 원하며 그의 전 생활을 그리스도화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또『어디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의 뜻은 무슨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설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마치 하나의 증명서와 같은 역할로써 여기에서 그들의 전 생활의 핵심을 찾아볼 수있게 하는 것이다.
A.RETIF는 그의 저서「Foiau Christeet Mission」(Parisㆍ1953ㆍPPㆍ41~44)에서 위의 증거를 역사적인 것과 법률상 그리고 성서적인 증거로 나누어 보았다. 맨 처음의 증거는 과거의 사실을 증인의 권위에 의하여 그 참됨이 보증되는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생활을 직접 목격한 자들로 증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과 제국의 권위자들로부터 죽음의 처형을 당하심을 목격한 증인들이다. (법률상의 증거) 그리고 성서적 증거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하느님의 원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 놓은 예언자들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장엄하게 선포한 사실이다.
그러면 증거의 효력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대표적인 복음운동을 보고 그들의 증거의 본질이 어떻게 듣는 자들에게 효력을 주었는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위의 문제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사도들 말을 듣는 자들의 반응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할 것 없이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반응으로서 성신강림절 날 사도 성 베드로의 강론이 어떻게 효력을 나타냈는가를 사도행전에서 똑똑히 볼 수 있다. (개종한 첫 사람들 2ㆍ37─38) 이와 같은 긍정적 반응은 절름발이를 낫게 한 후에도 일어났고(사도 3ㆍ4) 에디오피아에서 (사도 8ㆍ36─38) 베드로가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사도 10ㆍ44~46) 그리고 바오로가「테살로니카」에서도 (사도 17ㆍ4) 일어났으며 또한 다른 여러 곳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유태인들에게는 부정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베드로의 강론이 대제관과 그의 일당들로부터 거절되어 나왔을 뿐 아니라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했던 것이다. (CF사도 5ㆍ33 9ㆍ33 13ㆍ45 18ㆍ6 22ㆍ22) 또 다른 한 가지의 반응은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들은 사도들로부터 설교를 듣고선 어떻게 해야만 할지를 모르고 어리둥절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형의 반응(신앙을 가지고 받아들임과 전혀 믿지 않음과 의심)은「아테네」에서 바오로의 설교 후에 볼 수 있듯이 우리들의 주위에서도 항상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도 17ㆍ32~34)
중요한 것은 증거의 요소가 무엇인가를 알아야겠다.
증거의 요소가 되는 부분은 증거하여 내보이는 그 자체이다. 가브리엘 마르셀도 부르짖기를『…내가 증언하며 나설 때 나는 이미 그 증거의 효력을 선언하고 잇는 것이다』라 하였다.
(Gabriel Marcel,Being and Having, London,1949)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완전히 그리스도께 구속되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들의 옛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우리들의 복음화 운동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는 크리스찬 공동체의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Cf. 사도4ㆍ32─35)
우리 크리스찬 공동체가 나타내보이는 즉 증거하는 강한 신앙의 힘을 우리들의 생활에 반영시켜 비록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에게 크리스찬 공동체가 보여주는 그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사도 5ㆍ13─14)
또한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러했듯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는 없겠다.
언제 어디서나 반대하는 자 회의하는 자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라도 우리는 조금도 낙심함이 없이 부정적인 반응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의 증거도 그에 못하지 않게 강하여야 하겠다.
우리는 말로서만이 아닌 생활 자체로서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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