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총독부가 선포한「포교규칙」은 우선 쓸데없고 번거로운 서류의 제출을 계속 요구해옴으로써 교구 본부를 무척 성가시게 하였다. 불과 수 개월 동안에 무려 1천여 통이나 되는 서류를 작성해야 했던 교구 본부의 고충이 과연 어떠했던가를 우리는 교구 통신을 읽음으로써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월 26일자 교구 통신
『지난 8월에 선포된 포교에 관한 새 법령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이 새 규정으로 제출해야 했던 서류는 대략 이러하다. 첫째는「포교 관리자의 설치건」으로서 즉 주교를 서울교구의 관리자로 승인받기 위한 서류들이다. 이 승인을 얻기 위하여 수많은 교섭과 여러 종류의 서류 작성이 필요했다. 우리는 이 법의 시행일인 10월 1일 이전부터 수속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20일에 가서야 겨우 관리자의 승인을 얻었다. 관리자의 임명이 그 다음날 관보에 발표된다고 하더니 그것도 11월 13일에 가서야 발표되었다.
다음은 각 본당에 관한 서류로서 이에는 각 본당 신부 및 성당에 관한 진술서 각 3통이 첨부되어야 했는데 1통은 정부에 제출하고 남은 두 통은 교구에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제출한 서류의 대부분이 미비하다고 반환되었으므로 급히 정정한다 해도 도저히 기일인 연말까지는 제출할 수 없었다.
뿐더러 정부에 제출해야 할 것도 1통이 아니고 3통임을 뒤늦게서야 알았다. 즉 군에 1통, 도에 1통, 총독부에 1통, 이렇게 3통이다. 연말까지는 도저히 제출할 수 없었으므로 총독부에 교섭한 결과 1통은 연말까지 제출하되 남은 두 통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제출해야 된다는 양해를 얻을 수 있었다. 새로 준비해야 할 서류는 364종, 도면은 604개. 제도가와 비서들을 동원하여 1월 8일에 발송을 끝낼 수 있었다. 이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또 다른 요구가 있었다. 즉 각 본당의 담임자를 임명하고 그 승인을 받는 절차이다. 천주교회에선 본당 신부가 곧 해당 교회의 담임자라고 설명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무조건 새 요구에 응해야 했다. 1월 15일에 겨우 발송할 수 있었다. 요컨대 모든 본당을 위해 작성하고 검토하고 발송한 서류의 수는 도합 1332종에 이르렀다.』
금년에도 서울교구에서 작은 공(GOMBERT) 신부와 변(BODIN) 신부가 소집되어 본국으로 떠났다. 작년의 11명에 이어 또 두 명의 소집은 정말로 교구 사목에 치명적이 되었다.
민 주교는 당시의 어려웠던 교구 사목을 이렇게 전한다.
『지난 번 11명이 처음으로 소집되어 나갔을 때 우리는 본당 관할 구역을 넓히거나 아니면 서로가 분담함으로써(물론 과도한 부담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교우들을 1년에 두 번 정상적으로 방문하는 것만은 보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장기판이 너무 넓어져서 만일 자리가 하나 비게 되면 그땐 어쩔 수 없이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가 봄 판공을 치르고 있는 동안의 공 신부와 변 신부의 소집은 바로 이러한 혼란을 가져왔다. 이젠 더 이상 부탁할 만한 신부도 없었다. 그래서 큰 공 신부에게 <동생 신부의 일이니 그 지방까지 맡아 보시오>하고 떠맡겼다. 아무튼 가을 판공 때에는 주교 자신도 제물포 지방의 공소를 10여일간 도와야 한 사실은 당시 신부 기근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6월 13일 길(GUILLOT) 신부의 전사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다. 위생병으로 활약하다가 마침내 적의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이다.
때는 5월 14일. 이보다 앞서 1월 1일자 교구 통신엔 마치 자기의 죽음을 예측이나 한 듯 길 신부의 불길한 편지가 실렸었다. 12월 1일부로 발송한 길 신부의 연하장을 바로 오늘 아침에 받았다. 휴가 중에 써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서 그는『나는 아마도 여기서 새해를 맞을 것 같다. 그러니 이 해를 하직할 데는 어디일까? 프랑스? 시베리아? 한국? 아니면 천당에서? 누가 알 것인가? 천주님이 아시고 계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길 신부는 출정하기 전까지 용산대신학교의 교수 신부로 있었다.그래서 민 주교는 부득이 장류의 김 알렉시오 신부를 신학교로 불러들이는 한편 대구교구에 임시로 파견했던 김베드로 신부를 소환하기로 하고 그를 알렉시오 신부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9월 19일에는 그간 만 1년간이나 휴학 중이던 대신학생 39명이 모두 등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입생을 받는다는 것은 금년에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전쟁이 한국 교회의 성직자 양성과 포교 면에서 준 장애는 실로 컸다. 게다가 교회는 국내에서도 만만치 않은 방해 공작에 부딪쳤으니 곧 신도와 불교 측의 반천주교적 선전이었다.
지금까지 집안 일에만 몰두하던 중들이 유력한 일본인 불교도들의 선동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늘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연을 통해 선교사에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려 했다.『현재 도살장이 되어버린 구라파는 일찌기 어떠한 민족에게나 어떠한 시대에도 없었던 수난을 겪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싸우고 있는 민족들의 종교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교는 천주교 아니면 신교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두 종교 중에서 어느 것도 좋은 것이 못 되고 세상에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이해했을 것이다.』
총독부는 4월 25일 앞으로 明治 천황에게 봉헌될 신사를 공사비 약 1백만 원을 들여 남산 총독부 후면에 세울 계획이라고 공포했다. 사실 관리들 중에는 벌써 개인적으로 신도를 신봉하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신도로써 천황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드러낼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이 없으면 훌륭한 애국자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구실만 있으면 벌써부터 교회와 학교를 찾아가서 그 실천을 권해마지 않았다.
7월 25일 안봉근의 귀국이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봉근은 지난해 4월에 홍석구 신부의 주선으로 그와 함께 유학차 독일로 갔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일본 간첩의 혐의로 잡혀 감옥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 두 달 만에 겨우 풀려나 그는 영국「런던」으로 가서 그곳 일본 영사관의 주선으로 귀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봉근은 서울에 도착하자 백동의 성 분도 수도원을 찾았으나 거절되었다고 하며 이래 그를 본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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