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구장 안 주교는 지난 몇 년간을 회고하면서『우리 교구는 전체적으로 볼 때 약간의 발전을 보이고 있으나 대인 영세자의 수는 줄고 있다.뿐만 아니라 1915년 이래 시작된 이러한 저하의 경향은 내내 계속되고 있음을 시인해야 한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거의 수편적인 현상 유지에서 벗어나 전진을 하려면 어쨌든 구라파의 일들이 끝나야 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상 안 주교의 말과 같이 대구교구는 대인 영세에 있어서 1914년을 절정으로 하여 그 후로는 일로하향하고 있다. 통계를 보면 1914년의 1,235명 1915년의 1,101명 1916년의 902명 1917년엔 725명으로 나타난다. 또한 신자 수를 볼 때 1914년에 27,382명이던 것이 1917년에는 겨우 2천 명이 더 많은 29,374명으로 나타나 있으므로 여기에도 안 주교의 말과 같이 전체적으로는 교구의 교세가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인 영세운동이 이렇게 부진하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적자원의 부족에서 왔다. 대구교구는 전쟁으로 우선 2명의 선교사를 빼았겼다. 게다가 1915년엔 전주 윤(Baudounet) 신부가 사망하였고. 이어 임시로 빌렸던 김 베드로 신부를 서울로 돌려보내야 했다.
한편 이미 5년 이래 새로운 선교사의 파견을 중단한「빠리」 본부에도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안 주교는 16년의 전통을 가진 제주도의 2개 본당을 부득이 폐지하고 수녀들이 경영하던 학교도 페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목포의 엄(Taquet) 신부로 하여금 봄가을에 걸쳐 판공성사만은 치르게 하였다. 이 같은 조치는 안 주교의 말을 인용한다면 비록 일시적이며 전략적인 후퇴일지라도 강요된 것이고 보면 불행하고 비참한 후퇴가 이닐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 주교가 왜 그렇게도 방인 성직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설해야 할 새 교구에 가장 크고 시급한 걱정은 필연적으로 돈이었다. 뿐더러 생활비도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주교는 방인 성직자 양성사업을 최대한으로 발전시키고자 생활비를 절약해가며 물론 유익하긴 하나 이 사업만큼 긴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다른 사업들을 희생시켜 나갔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 사업에 있어서 시초부터 현명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난엔 아랑곳없이 서울교구마저 중단한 신입생을 계속 받았다. 안 주교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때 그분이야말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기존 사업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사업인 방인성직자 양성이다. 이것이야말로 보다 나은 장래를 위하여 근거있는 희망이며 6년 전 교구 발족 당시에 낙관주의자들이 예측하지 못한 우리 교구의 희망이다. 그러나 신학교란 장시일을 요하는 일이다. 금년에야 겨우 첫 신부가 나왔고 다음은 3년을 기다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포교사업의 발전을 용이케 할 정도로 방인 성직자의 수가 채워지려면 아직도 6년 내지 9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한편 서울교구도 전쟁으로 인하여 받게 될 인적 자원의 부족은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나던 바로 그 해에 11명의 신부가 동원되었고 출정한 신부 중에 길(Guillot)과 오(Boulo) 두 신부가 전사했으며 국내에서도 그간 곽(LrGac) 신부와 노(Rouquette) 신부가 사망하였고 금년에는 부주교이며 약현본당 신부인 정(Doucet) 신부가 사망하였다.
영세자가 감소하는 현상도 대구와 비교하면 좀 덜하긴 하나 아무튼 하향의 추세는 매양이다. 통계상으로 1914년에 2,339명이 1917년엔 1,448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교우 수를 보더라도 1914년 이전이라면 해마다 거의 2천 명이 증가한 데 비하여 1917년에 와서 교우 총수는 57,914명으로서 이것은 3년 간에 2천3백 명의 증가를 보인 숫자에 불과하다.
또한 언제가는 방인 성직자로 대치하기 위한 신학교 사업에 있어서도 서울교구는 대구와 비교할 때그것이 현명한 처사였다고 자위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긴 안목에서 볼 때 좀 옹졸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 같다. 왜냐하면 민 주교는 교수신부가 부족하다 하여 한때 무기 휴교 조치를 취했는가 하면 수 년간 신입생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민 주교는 이렇게 변명한다.
『사람도 부족하고 돈도 없어서 용산신학교는 신입생을 2년 또는 3년 만에 받아야 했다. 1914년 전쟁 나던 해에도 신입생을 받기는 하였으나 교수신부 3명 중에서 2명이 소집되어 혼란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 전쟁이 오래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신입생을 취소하였고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계속하여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금년엔 서울교구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지 않기 위하여 신입생을 받기로 하였다.』
이같이 신부가 항상 아쉬울 때 용산신학교는 다행히도 4명의 새 신부를 배출시킴으로써 그간 공석 중인 본당을 상당히 보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 당시의 42개 본당을 모두 총당시키지는 못하였고 그 중 34개 본당만이 충당되었다. 새 신부의 서품을 계기로 하여 합덕의원 신부가 당가로 임명되었고 20년간이나 당가를 맡아본 우(VIillemot) 신부가 성문 밖 성요셉성당의 본당 신부로 가게 되고 문안 종현본당의 박 (Poisnel) 신부가 부주교를 겸임하게 되었다.
포교 발전상 인적 자원에 버금가는 장애는 물적 자원의 부족이었다. 구라파로부터의 원조의 감소는 교회의 모든 사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타격이 큰 것은「성영회」의 사업이었다.
따라서 불우한 어린이들을 새로 받아들이는 일은 일체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받아들인 어린이들의 현상 유지마저도 벅찼다고한다. 또한 성바로로 수녀들이 경영하는 서울과 제물포의 고아원도 원조의 부족으로 부득이 원아 수를 줄였으나 그래도 비싸진 생활비 때문에 수녀들의 헌신과 열성이 아니고선 고아원을 유지하기 위한 온갖 시련을 극복하기란 실로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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