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대 건축을 받아들일 때 그 근본 정신을 이해해야 했고 현대 건축을 있게 한 전 시대의 흐름을 통찰해야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꼬르뷔제는 조소성으로 로에는 합리성으로 오역되었다.「기능」은「생활」에 우선하는 것으로 착각되었고 그리고 사상보다는 그 디테일들이 열심히 묘사되었다.
강철과 유리가 우리의 재료로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수상한「민족주의론」이 대두되었다.「한국의 현대 건축은 그리하여 한국의 교회 건축은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이 일견 당연해 보이는 논리는 현대 건축의 의미를 부정하며「공번된 교회」로서의 이념을 퇴색시켰다. 한마디로 해서「순교복자 기념성당」은 문화사적 희극이다. 초가 지붕과 장독대의 조형적이고 우화적인 이미지의 재현은 한 설계사의 감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편견과 Scale의 무감각과 시대성에의 착오와 교리에의 몰이해와 작가적 자만의 범벅이다. 우리는 굳이「한국적」이니「전통적」이니를 들먹일 필요가 없다. 건축에 있어서 의도적인 지역성의 강조는 그 본질을 해친다. 그것은 나치의 위광을 돋보이게 한 슈페어의 의도적인 작품들과 가식 자만 프로파 간다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진실로 한국적인 것은 우리 생활 우리 의식 우리의 미적 가치관 속에 깊이 침잠해 있다. 그것은 생활의 표현이며 체취의 반영이며 우리 느릿느릿한 몸짓의 총체이다. 우리가 제 아무리 바로크나 로꼬꼬에 미쳐도 그것을 흉내내지 못하듯이 서양 사람들이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는 그런 것들이다. 절대로 그것은 몇 마디 말로 어떤 형태로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없어야 한다. 혹 어떤 특별한 건축 재료가 풍기는 냄새가 있을 수 있고 우리 고유의 둔한 듯한 비감각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건축의 표현이 특정한 재료의 질감에만 의지하는 것은 편협이다.
국제주의 (인테내셔널리즘)는 말할 것도 없고 쉬운 예로 그리스나「로마」의 고전들이 꼭 대리석이어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은「한국적」이라는 편협한 주장에 동조를 않는 것이지만 그것이 또「고대 한국적」이라고까지 좁혀서 이야기된다면 한 마디로 논쟁의 가치가 없는 일이다. 왜 우리가 지금 그렇게 과거 지향적이어야 한단 말인가.「한국학」이 그리고 어떤 사계의 석학이 우리 고유의 비례감을「모듈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것은 분명히 대단한 업적이지만 어느 건축가가 그「모듈」을 이용하겠다고 시도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독창성의 결여이거나 시대적 착각에 불과한 것이겠다. 인접 전부의 그리고 어떤 민족의 스케일과 비례감이 있고 그 안에 또 어떤 작가의 고유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구나 그 고전적 모듈(moduie)은 현대 한국인의 확장된 의식에 현대화된 생활에 걸맞는 것도 아니어야 옳다. 만일 어떤 사람이「현대 한국인을 연구하고 그 의식 구조를 미적 가치관을 비례감을 연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삶의 문제이다. 그것을 민족의 문제로 확대 해석하고 그런 문제의식의 결여를 배반으로 매도하는 것은 금도가 아니다. 우리는「세계의 한국인」이며 민족의 문화는 정지된 상태에 있지도 않다. 다보탑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자랑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을 거슬러올라가 흉내내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일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보다는 교회 건축이 더 먼저 현대화되었고 교회 건축의 한국화가 교회의 한국화에 앞장서 있는 것이 우리 사정이다. 그러나 그 현대화와 한국화가 옳은 것이냐를 따져 볼 때가 되었다. 아직까지는 그 대답은 분명히 부정적이다. 오히려 우리가 교회의 한국 현대 건축에 있어서의 위치와 영향에 관심을 두는 것은 현대 건축의「기능적」이라는 깃발의 과장된 해석이 아직 성당 건축의 경우에까지 오염되지는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현대적인 오피스타우어가 기능과 능률 위주로 사람들을 식상하게 해도 아무리 상자곽 모양의 아파트들이 어린이들의 꿈을 짓밟는 현대라 해도 아무리 이런 일들이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해도 아직은 성당이 기능적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 감동적인 공간 해결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건축은 (광범한 의미의 종교 건축)은 아마도 현대 건축의 마지막 보루이겠다. 현대에 있어서라는 명제가 성당 건축의「기능화」에까지 비약해서는 안 된다. 이제 아무리 성당이 시장 한가운데 세워져야 하는 때가 되었다 해도 우리는 꼬딕성당을 세우던 사람들이 왜 그처럼 높은 첨탑을 꿈꾸었고 감동적인 내부 공간을 만들려고 그 많은 벽돌들을 하나하나 쌓아 올렸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난립이 우리의 종교 건축을 바락크밖에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인식시키기는 하였지만 그러기에 성당 건축은 더 아름답고 더 현대적이며 더욱 교회에 충실한 것으로 세워져야 하는 시기에 와 있다. 현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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