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품학당」(神品學堂)으로 불려온 신학교가 제자리를 잡은것은 원주 부흥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있던 신학당이 1888년 서울 용산으로 옮기면서 부터였다. 한국인 사제의 양성은 초기교회부터 박해를 거치는 동안에도 교회 지도자들의 가장 큰과제였던 만큼 신학생 교육을 위한 노력은 끈질기게 이어져왔다.
첫시도는 1837년 모방(MOUBANT羅伯多錄) 신부가 김대건 최양업 최 방지거 세학동을「마카오」에 있던 교황청 포교성성 직속 경리부에 유학시켜 김대건은 1845년 8월17일 최양업은1849년 4월19일 한국인 첫째와 두번째 사제로 서품된데서 시작된다.
1854년부터는「말레이」반도「페낭」(PENANG)에 있던 페낭신학교(빠리외방전교회가 박해로 신학교를 둘수 없는 동양제국의 신학생 양성을 위해둔 일종의 국제 공동신학교)에 기회있을때마다 유학생을 보내 1884년에는 21명이 유학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1856년 베르뇌 장(BERNUEX) 주교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 집 한채를 사「성요셉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 10명을 가르치다 병인박해로 해산되었고 1877년에는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황해도 배천이라는곳 에서 3명을 교육시킨 일이 있었다.
그러다「페낭」유학생들이 열대기후로 그 중 7명이 병사하자 1885년부터는 유학생 파견을 중단시키고 부흥골에「신학당」을 설치하고 국내 교육에 힘쓰게 되었다.
이 학교는 3년 계속되다 1887년 용산으로 옮기면서 학업 도중 귀국한「페낭」유학생과 신입생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사제양성 기관으로 출발했다.
배론의「성요셉 신학교」는 한국에 있어 첫신학교가 되는 셈이며「용산신학교」로 불려온「예수성심 신학교」는 현대적 교육제도와 시설을 갖춘 신학교로 그 전통은 오늘의「가톨릭대학 신학부」로 이어온다.
용산신학교의 편제는 중등과 3년 고등과 3년 철학 2년 신학 4년 12년제로 엄격한 프랑스 신부들 밑에서 최대의 인내를 요구하는 스파르타식 교육이었다.
입학부터가 본당신부가 오랜기간 성소(聖召)가 있는지 관찰한후에라야 추천서를 써주기 때문에 몇대씩 내려오는 구교우가 문의후예가 대부분이었다.
1920년대 수원의 어느신부는 열살백이 지원자를 무려 4년간 미사시중 군불때기를 시켜 단련시킨후 수속을 밟아주었고 가난한 교우의 철부지아들은 신부가 아침 저녁 먹는 흰쌀밥이 좋아「신품학당」의 꿈을 키우기도 했었다.
모집은 대개 2~3년마다 한번씩 했는데 교우집안이라면 신부나는 것을 큰영광으로 알던 때인만큼 지금처럼 지원자가 딸릴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9월13일경이면「신부의 꿈」을 안은 소년들이 용산으로 모이는데 교우아들에 서울구경이 대부분 처음이란점 외엔 시골서당 다니던 친구, 보통학교 나온 친구에 차림새도 가지각색이었던 모양이다.
1930년대 소신학교 신입생 모습을 이렇게 회고한다.
『서울, 서울 듣기만 하던 한양 용산신학교에 시골뜨기 꼬마들이 입학했다. 중의 잠방이 등걸이 바람에 미투리신은 놈에, 댕기꼬리 딴 놈에 시골뜨기 만물상이다. 그 중에도 애아비만큼씩 큼직큼직한 시골뜨기도 섞여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는건 호된시련뿐 촌음의 여유도 없는 규칙생활에 엄격한 규율, 생후 처음배우는 라띤어의 어려움, 온기라곤 느낄수 없는 기숙사방, 거기에 절대에 가까운 복종.
시골서 멋대로 뱉던 침 한번 잘못 뱉는 날엔「식당벌」로 밥굶기가 일쑤고 라띤어 아닌 다른말로 대화를했다간 벌로 쇠덩이를 아기처럼 안고 다녀야 했다.
그럭저럭 소신학교6년을마치고 대신학교에올라가면 또 모든생활이품(品)으로연결되는 눈치보기가시작된다.
병에걸려도 시험에낙방해도 고분고분하지않아도한마디「성소가없다」는이유로 보따리를 싸야하다보니「얼거미질한다」는은어가 생기기도했다.
지금 50~70대 신부들을 가장 울린 것이 교지「따벨라」발간이었다.
1918년부터 월간 16페이지로 발간된 이 표지는 전과정이 대신학생들 손으로 이루어 졌는데 학과시간을 빼곤 온통 매달리기가 일쑤였다.
오자(誤子) 하나만 나와도 불호령에 심하면 품이 연기되고 어떤 신학생은「따벨라」에 한이 맺혀 도중 하차 하기도 했다.
지금은 은퇴한 어느 신부는 죄없는 인쇄기를 망치로 두들기며 신세타령을 하다 교장신부에게 들켰는데 다행히 품만 1년 연기되었다.
때문에 12년의 시련에 갖은「얼거미질」을 피해 서품까지 가기란 어려운 일이어서 1932년 서품반은 37명 입학에 겨우 일곱명이 남았을 정도였다.
용산신학교는 1914년 대구에「성유스띠노신학교」가 생기기까지 유일한 신학교였다.
1927년 원산교구 설정과 함께「덕원 대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용산소신학교는 1942년 현 혜화동 대신학교 자리로 옮긴후 대신학교는 1945년 2월「경성 천주교 공교 신학교」로 개칭되면서「유스띠노 신학교」와 통합했다.
이에 앞서 1942년 용산대신학교는 일제의「무허가 학교」라는 트집 때문에 일시 폐쇄하고 대신학생 전원이 덕원대신학교로 전학하는 시련을겪어야 했다.
그 후 용산대신학교는 47년 대학으로 승격되면서「성신대학」으로 개칭했고 54년 의학부를 증설하는 한편 59년엔「가톨릭대학」으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 72년부터는 87년 지켜온「금녀」의 전통을 깨고 학부에 한해 여자를 입학시키는 일대 개혁을 단행했으니 시대의 변천은 참으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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