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AD 980년에 어느 이름 모를 화가에 의해서 그려졌으며 현재 독일「라이헤나우」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그림은 천연색으로 그려졌다.
이 그림에 대한 묵상을 잘 하기 위해서는 그림의 색깔들을 잠깐 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림의 전 배경은 황소, 핏빛이며 예수 아기옷, 성모의 웃옷, 성요셉의 망또와 당나귀는 모두 같은 색채로 회색이 약간 섞인 검붉은 피색이며 주름선은 까맣게 또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예수가 누워 있는 자리는 세 사람의 얼굴과 성모 마리아의 치마나 요셉이 입고 있는 옷과 함께 황소의 빛갈과 같은 연두색이다. 세 사람의 머리 위에 둘러져 있는 후광은 금빛인데 가장자리에는 빨간 선이 아주 가늘게 그려져 있다. 마리아가 누워 있는 요람 같은 구름과 예수가 누워 있는 제단 밑은 꼭같은 하늘색이다. 제단 옆쪽은 배경보다는 좀 연한 붉은 색깔이며 구멍은 검정색이다.<역자註>
이 그림은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황소 핏빛의 뒷배경에 삼각을 이루고 있는 구도로 시선은 비단에 싸여져 있는 어른 아기에게로 쏠린다. 쭉 뻗은 채 묶여져 책상 비슷한 널판 위에 누워 있는 모양은 마치 주의 고양이 제물로 봉헌되는 모습과 같다. 이 책상 비슷하게 생긴 것은 제단일까 아니면 어느 바실리까의 편편한 천장일까? 이런 구유 형태는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에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먼저 자세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겠다. 구유 형태나 문헌적 설명이 아니고 우리와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여기서 이루어진 것이다. 색채ㆍ자세ㆍ구상들은 모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진상(眞相)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멀리 바라다보는 듯한 하느님, 아기 눈은 모든 것을 아는 듯하며 심각하게 보인다. 그 눈은 이미 탄생 시각을 지나서 성부의 시간과 죽음의 시간과 우리 구원의 시간을 벌써 바라보는 것 같다. 팔과 함께 묶여진 몸은 말없이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는 황소와 당나귀에게로 곧 굴러 떨어지려고 가장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이스라엘이 배반하게 될「주님의 구유를」알아볼 수 있을까?
왼편에 있는 여인은 -끝이 그림 가장자리까지 닿았음- 하느님 어머님이시다. 그녀는 구름 같은 푸른 쿠션에 기대고 있다. 오른팔은 쉬는 양 무릎 위에 가볍게 놓였고 왼팔은 마치 무엇을 생각하는 양 머리를 고이고 있다. 그녀의 커다랗게 뜬 눈, 갈라진 눈썹, 꼭 닫혀진 입, 까만 눈꺼풀과 경청하는 듯한 귀-이 모든 것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오른편 구석에는 요셉의 모습이 반만 나타나 있는데 뛸 자세를 하고 있다. 요셉은 마리아를 응시하고 있으며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 신비를 꿰뚫어보고 있다. 그의 오른팔은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놓여 있고 왼팔은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모양이나 발가락들은 꼭 붙어 있어 뛸려고 해도 쉽게 벌려지지 않을 것 같이 보인다.
아기 어머니 아버지가 세 구석에 뚜렷하게 갈라져 위치하고 있다. 이 모양은 결코 가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우리와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 보기로 하자!
하느님은 말씀 안에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침묵 속에 존재한다. 위의 형상(아기 어머니 아버지) 하나하나는 이 신비의 체험에 있어 각 영혼에 부과되는 한없는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 왜냐면 각자가 다르게 신비적 순간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옷 빛깔로 그들 마음의 움직임을 더듬어 볼 수 있다. 그 내적 사고의 흐름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로 옮아가지만 언제나 다시 원천인탄생의 신비에로 이른다.
그림 위에는 금빛으로 새겨진 카톨링 식의 소문자로 아래와 같은 텍스트가 쓰여 있다. IN VIGI LIA NATALIS DOMINI (주 탄생 전날)『오늘 너희들은 알지어다……
그리고 내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망 축일 입당송에서 노래하지 않는가? 아직은 침묵 중이며 신앙의 어둠 안에 하느님의 지시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때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직관함이 아니다. 양은 이미 도살될 준비가 되었고, 제단 밑에는 황소와 당나귀가 꿇어 있다. 우리는 고양의 위대성을 이성으로 인식하거나 측량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아를 이탈할 때 직관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 묶여진 고양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우리를 위해 피를 쏟고 있는 것이다.
신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는 그 신비 안에 파묻혀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그 신비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주여 우리에게 신앙의 신비에 항구한 은혜를 주소서. 이 신앙의 신비는 우리에게 인간의 유한한 한계를 깨닫게 하여 우리를 겸손케 하고 구원의길로 이끌게 하시며, 또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확장케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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