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환자가 제일 많다는 광동성에 왔으니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관계기관과 연락을 취할 수 있을까하는 궁리뿐이었다.
나는 우리의 안내자 양씨에게 이미 적어온 광동성 나환자 관리기관의 주소를 보여주며 연락을 취해줄 것을 간청했다. 약 30분간 이리저리 다이얼을 돌리던 양씨는 오후 5시면 퇴근해서 사무실에 사람이 없으며, 집으로 개인적인 연락은 또 안 된다는 것이었다.
허탈했다. 단체여행 중에 개인적인 시간을 뺄 수 없기 때문에 수용시설은 방문하지 못하더라도 관계기관과 연락선만은 확보하려 했었는데…
대신 나는 북경으로 떠나면서 그곳에 남아있을 안내자 양씨에게 나환자들에게 주라면서 갖고 온 내의ㆍ블라우스ㆍ양말 등의 선물을 한 아름 건네주었다. 가능하면 조선족 나환자에게 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덧붙여 양씨에게 나는 북경의 마 박사를 아느냐고 물었다. 양씨는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유씨가 대뜸 안다면서 2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나환자 관계기관도 유 박사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는 절망감이 엄습해오고 있는데 뜻밖에 유씨가 『우리 집이 북경인데 그곳에 가면 적십자사와 연락이 되도록 주선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희망의 한 가닥 빛이 뇌리를 스쳤다.
급성폐렴으로 입원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에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유씨의 부축을 받으며 급히「서안인민병원」에 입원했다. 진단결과는「급성폐렴」이었다. 일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데다 방중 3일 만에 입원하자 그때의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착잡하고 비판적이었다.
그 병원은 나를 외국인이라고 특별실에 입원시키고 간호원도 3명이나 딸렸다. 병원시설은 형편없었지만 사람들은 순박하고 친절하여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다. 이번 중국 방문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길래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팠으면 무모한 계획이었다는 후회감이 겹쳤다.
유씨는 나에게 북경에 가면 부인이 의사여서 주사도 맞고 약도 얻어주겠다고 위로했다. 올해 39세인 유씨는 나를 부모 대하듯 공손히 대하며 자리를 옮길 때마다 옆에서 부축하며 위로해주었다. 나는 이때 비로소 유씨에게 중국에 온 「숨은 목적」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발병은 하느님의 뜻”
나는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목적으로 왔다는 것과 하느님의 사랑을 중국 나환자에게 전하고 싶다는 뜻과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모르며 사소한 일이라도 정치적인 것이 관계되면 그것을 배격한다는 것 등의 내 입장과 의사를 전달했던 것이다.
종교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란 유씨로서는 종교에 대한 지식이 백지상태나 다름없다. 「가톨릭」이란 말도 몰랐고「천주교」라 하니까 약간 아는 듯 했다.
나는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우리 가톨릭에서 행하고 있는 사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유씨는 중국의 나환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듯했다. 다행히 유씨는 가톨릭의 구라사업에 감명을 받은 듯 북경에 가면 적십자사를 통해 내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또 열이 오르는지, 달아오르는 몸을 의자에 가누며 나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내가 발병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병을 앓았기에 쉬는 기회가 생겼고 그때 비로소 내 뜻을 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었던 것이다. 내 발병이 어쩌면 하느님의 뜻일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이상하게도 쇠약한 몸에 힘이 불쑥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북경에 도착하자 유씨는 여러 가지 약들을 사다주었다. 그래도 열이 더 나고 정신이 혼미해지자 나는 나도 모르게『이러다간 귀국도 못하고 죽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자 유씨는 대뜸『하느님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순간 전류가 흐르는 듯한 짜릿한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외쳤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한말이겠지만 유씨로서는 평생 처음으로 「하느님」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북경에서 문화교류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우리 일행의 핵심적인 목적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무리하게 토론회에 참석했다.
중국 측에서는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관계자들과 북경의 대표적 서예가, 그리고 북경대학교수 등 10여명의 서예 대가들이 참석, 우리 일행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3시간이상 진행된 이날 토론은 기대이상의 성과를 얻었다며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감동스러워했다.
토론을 마치고 나는「조선족」통역여학생과 함께 인근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호텔로 오는 길에 나는 여학생에게 가장 가까운 성당으로 안내해달라고 요청했다. 내일은 만리장성 관광을 하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이 아니면 성당을 방문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여학생은 병세가 완연한 나를 보더니 극구 만류했다. 이런 몸으로 자꾸 나다니면 큰일 난다는 것이다. 「다 죽어가면서도」기를 쓰고 가야겠다고 우겨대는 나를 본 그 여학생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나를 안내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만약 북경에 갈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2백 년 전 이승훈 선생이 세례를 받은 장소인 북경 북당성당을 방문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북경의 성당을 꼭 찾아야만 하는 또 하나의 절박한 사연이 있었다.
기적의 성모상 전달
지난 3월 일본 가톨릭미술전에 작품을 내기 위해 일본에 갔었는데 그때 후꾸오까(福岡)의 오옥스(大楠) 본당주임 우노 신부님을 만난 자리에서 4월에 중국에 간다고 밝히자 신부님은 손수 만드신 성모상을 주시면서 아무라도 좋으니 꼭 중국인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그런데 석고로 만들어진 이「석고 성모상」은 선물로 받은 사람마다 신앙의 눈을 뜨게 되는 이른바「기적의 성모상」으로 소문나 있었다.
안내된 곳은 북당이 아니라 주교좌 남당성당이었다. 석옥곤(石玉琨) 주임신부님에게 중국에 온 목적을 말하고 그 성모상을 드렸다. 큰 짐이라도 벗어버린 양 홀가분해졌다. 성당에 들어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데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밤늦게 유씨가 부인과 9살 난 딸을 데리고 호텔을 방문했다. 유씨 부부의 헌신적인 호의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딸아이에게 선물을 줄 것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묵주가 생각나서 그것을 주자 그 아이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이번 중국 방문 중 감명 받은 것 하나는 중국 어디를 가나 공공건물이나 식당에서 동양화와 서예들을 볼 수 있었던 점이다. 사군자를 전공하고 있는 나로서는 반가왔고 많은 작품들을 대할 수 있어 귀한 공부가 되었다.
전통적인 동양화와 서예는 푸대접을 받는 반면 서양화라야 작품과 작가로서 인정받는 우리 나라의 풍토는 시정되어야 한다고 일행은 입을 모았다.
나는 유씨에게 구라사업에 종사해온 지난 10년간 구라기금 마련을 위한 개인전을 개최한 사실을 설명하고 가능하다면 북경에서도 한번 개인전을 열고 싶다는 희망을 비췄다.
유씨의 말에 의하면 중국에서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이를 사고판다는 것이다. 개인전을 열어 작품이 팔리면 경비를 제한 수익금은 모두 중국나환자 지원에 쓰겠다고 하니 유씨도 좋은 일이라면서 대환영을 하며 적십자사를 통해 추진해보겠다고 말했다. 마침 과거 개인전을 열었을 때의 신문기사를 복사해둔 것이 있어 유씨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앞으로 구라마리아회의 조직을 강화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 부서도 만들어 우리보다 가난한 이웃 나라의 나환자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유씨에게도 기간은 아직 정할 수 없으나 중국 구라지원의 기금의 마련되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했더니 역시 적십자사를 통해 초청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내 병세는 거짓말같이 호전되어갔다. 「천진」에서 서예인과의 만남, 「제남」을 거쳐「곡부」의 공자묘를 구경하고 태산도 올랐다.
15일의 방문기간 동안 유씨의 극진한 호의는 유씨의 천성인 탓도 있겠지만 나는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믿고 있다. 나는 중국 땅을 떠날 때까지 궁금하면서도 왜 처음부터 나에게 관심을 가졌는가는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일행의 중국여행에 대해 중국당국이 베풀어준 호의에 모두 진심으로 감사했다.
15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상해에서 비행기에 몸을 싣자 만감이 교차하는 석별의 아쉬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별의 안타까움은 구라사업을 적극 추진하면서 재회의 보람으로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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