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례 후 청소지도를 끝내고나서 교실을 나서려는데 승아가 슬며시 다가왔다. 명랑한 성격으로 매사에 적극적이어서 수업시간 중에도 승아의 목소리가 간간이 돌출되곤 했었다. 조금은 머뭇대는 표정으로 내 눈길을 피하듯이 옆으로 비껴섰다.
『선생님, 저 요즘 그래요. 학교에 나오기도 싫어요…』
또렷한 목소리로 단숨에 얘기했다. 수첩이랑 이런 것들을 다시 교탁에 올려놓고 텅 빈 교실 창가에 마주 앉았다. 승아에게 예기를 시키는데 그리 힘이 들것까지 없었다. 내게 의논하려는 뜻이 있었던 터라 승아는 차분하게 얘기를 펴나갔다.
여러해 전부터 승아의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잘 안된다고 했다. 엎친데 덮치기로 지난해에는 사업관계의 일로 법정의 일(고소사건)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바람에 식구들이 우울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지쳐있고 신경질이 많다고 했다. 승아에게는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는 대학생인데 며칠 전 집 앞에서 친구와 크게 다투었다. 남자가 개입된 일인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억울한 일이 생겨서 친구 간에 서로 따져보는 과정에서 그만 동네가 창피스럽게 몸싸움(머리채를 잡는)까지 일어난 것이다. 그쪽 집안에서 고소하겠다는 협박이 왔다고 했다.
승아는『오늘은 집에 가는 일도 싫어졌다』는 것이다. 승아답지 않게 몹시 지쳐있었다. 나는 내게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가끔 이렇게 자신이 아닌 일로해서 청소년들이 갈등을 겪는걸 보는 때가 있다. 가슴 한구석이 미여지는 것처럼 찡하는 통증을 느끼는 때이다.
『승아야, 지난번 중간고사 성적이 뜻대로 되지 못했다던가, 아니면 요즘 공부가 잘 안된다던가 하는 그런 자기 자신의 일 때문이 전혀 아니라는 걸로 들었는데 사실이냐ㆍ』 큰 눈을 들어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승아를 나는 마주 보았다.
『식구는 내겐 아주 가까운 처지지.
그러니까 아픔을 서로 이해하고, 나누고 격려해야 된다. 가족이니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증거지. 그런데 넌 그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태도와는 좀 다르구나. 모른척하는 외면은 절대로 나쁘지만 식구들의 어려움 때문에 나 자신이 견딜힘과 노력이 부족해서 스스로 포기한다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란다』
이런 내용의 얘기를 한 시간 넘게 서로 나누었다. 『승아야 중국의 도연명이란 사람을 너도 알지. 국어시간에 배웠으니까. 그분이 귀향하고 나서의 일이다. 아들 다섯이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단다.
첫째는 16살이나 됐는데 하는 일 없는 건달이고, 15살인 둘째는 한문에 전혀 뜻이 없었단다. 그 밑은 쌍둥인데, 6에 7을 더하면 제 나이가 된다는 간단한 셈조차 못하는 바보였더래. 막내아들이 그때 9살인데 군것질 생각만 하더란다. 아버지로서 기가 찰 노릇이었지. 그러나 도연명은 탄식이나 하는 미련한 아버지는 아니었단다.
「자식을 책한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 속에서조차 어두운 모습이 없는 것은 개성존중이 중요하고, 각자 자기에게 어울리는 본분이 있고, 그 본분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한 거란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할일이 있고, 언니는 언니대로의 입장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승아도 중학교 2학년인 착한 동생얘기를 했다.
『선생님 오늘 제 동생 생일이거든요』오늘밤 친구집에 가서 자기로 약속했다던 승아가 정신을 차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에게 가정은 유일하고 멋진 안식처이어야만 한다.
흔들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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