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신앙생활을 엄격ㆍ금육일변도로 몰아 부치며 그것만이 교회생활의 본질인양 주장한 사람들은 이단설로 판정을 받았다. 엄격한 생활금욕의 실천이 나빠서가 아니다. 건전한 교회생활의 본말을 전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는 것이 특징이다.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한다. 텔레비전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라고 자기 자녀들을 몰아 부치는 부모들의 말은 전적으로 틀렸다. 차타고 다닌다, 테니스 친다, 골프 친다, 주말에 놀러다닌다 등등 소위 요새의 레저생활을 비난하며 자기의 어떤 특별 신심을 부각시키려고 유인물을 돌리는 극렬 열심파도 있지만 신앙생활은 인간생활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영성적인 발전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는 비난과 함께 일어났던 충돌은 단식 재계문제를 놓고 또 새로운 논쟁을 일으켰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정신의 철저한 실행으로 단식재계를 지키고 있다. 유대아인들의 단식재계는 야단스러운데가 있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 포도주와 물도 마셔서는 안 된다. 그리고 거친 삼베옷을 입고 땅바닥에 앉아 옷을 찢고 먼지나 재를 머리에 뿌리며 통곡을 한다. 이렇게 재계를 지키는 것은 국가적인 재앙을 당했던 일을 비탄하기 위한 공동체적 재계일을 지킬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속죄의 날」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적군들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애통히 여기기 위한 것이었다.
국치일을 비탄하게 지내고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어느 민족이나 당연히 하는 일이며 종교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당연하고 신심적인 단식을 예수의 제자들이 왜 하지 않느냐고 몰아 부칠 때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신심행위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성경문구를 써넣은 작은 갑을 이마에 달고 다니었고, 재계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리고는 남을 신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런 재계방법은 이미 예언자들이 신랄하게 비판한바 있다(이사58.1~5:요엘2, 12~13).
예수께서도 이제부터 재계방식을 바꿀 것이다. 우선 그 종교적인 정신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기쁨의 종교이다. 그것은 구약시대부터 예언자들을 통하여 혼인잔치를 비유로 설명하며 약속한 기쁨이다. 그것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기쁨이며 하느님이 당신백성을 반기는 기쁨이다(이사62, 5). 그 기쁨은 인류가 구원되는 기쁨으로 그 기쁨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로 오신 이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랑을 맞이하여 그 뒤를 따라 잔치에 들어가려는 수행꾼들이 찌푸린 얼굴로 슬픔에 잠길 수야 있겠는가. 축하하러 온 신랑의 친구들이 단식으로 비통해할 필요는 없다. 잔치를 치를 때는 기뻐해야 하고 장례를 치를 때는 곡을 해야 한다.
초대 사도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생각하고 단식과 재계를 하였으며 이 심정은 새 세대로 교회생활에 이어져 일정한 시기에 재계를 지키는 관습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사도들은 초생교회 때부터 박해자들의 추적에 시달리면서도 새 세대 새나라가 임한 것을 기뻐하며, 기쁨에 넘쳐 서로 돕고 함께 모여 사랑의 성찬을 같이 나누어 먹었다.
새 세대는 새 기분으로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심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세대를 열면서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헌옷에 새 천을 대고 기워봤자 옷은 점점 더 찢어지기만 할뿐 헌것(율법시대)은 폐기할 때가 온 것이다. 새로이 임한 하느님의 나라는 율법을 빌미로 각종 외부적인 형식으로 경직된 경신(敬神)의 종교가 아니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풀어나가는 개방의 종교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언제나 희희낙락 즐거움만 누리는 나라는 아니다. 이 나라가 기쁨의 잔치고 상징되는 희망찬 나라이기는 하지만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온다. 지상에 임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이 끝날 때 영광의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완성될 나그네 교회이다. 이 나라의 시민들은 희망찬 기쁨을 간직하면서 늘 어려움을 극복할 도정을 앞에 놓고 있다. 그 도정을 거를 때 그들은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 「신랑을 빼앗길 때」이 말씀은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을 암시적으로 예언하신 첫 번째 말씀이다. 기뻐해야 할 때는 기뻐하고 슬퍼해야 할 때는 슬퍼해야 한다. 만사에는 각기 그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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