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방황의 시대
오늘 세계의 일반적인 현실에서 우리나라에로 눈을 돌려본다. 우리나라의 사회현상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신적인 기둥이 없이 유물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는 것이다. 오랜 민족사를 통하여 오늘과 같이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시대는 일찌기 없었다. 민족의 주체성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요구되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주체성의 바탕이 되는 사상이 없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는 화교의 정신이 나라와 겨레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서 국가나 국민의 사상과 실천이 일정한 목표 내지 표준을 가지고 있었고, 국난에 처하여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력을 불교에서 발견하였다.
유물적인 한국 사회
이조시대에는 비록 불교가 그 영향력을 감소 당하였지만 민중의 마음의 귀의처가 되어 있었고, 유학이 수신제가치국의 근본 원리를 이루고 있어서 국가나 국민의 행동 기준이 객관적으로 정립되어 있었다. 불교나 유학의 세계관 내지 인생관에 대한 평가는 별도로 따진다고 하더라도 여하간 불교나 유학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굳건한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고 구체적인 행위를 지도한 것만은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생활 철학
그런데 이조 말기에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거쳐서 해방 후 오늘에 이르는 격동기에는 기계문명의 세계화와 더불어 잡다한 사상 체계가 혼입되면서 불교나 유학은 차라리 진보를 가로막는 것으로 인정되어 이 왕의 정신적 바탕은 허물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불과 2세기의 역사밖에 갖지 못한 천주교나 개신교가 토착화되어 있지도 아니하다. 이렇게 대다수 국민에게 있어서 종교적 신앙이 예외에 속하는 한국에 건전한 윤리관이 설 수 없다. 윤리의 근본은 절대자와의 관계인데 그것을 해명하는 종교도 없이 인간 상호 간의 관계만을 규정하려 할 때 그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 막연한 것이다.
흔히들 국민윤리의 목표를 홍익인간이나 국립민복에 두려 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그 수단으로 보려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홍익인간이며 국리민복인지 결정적 해답을 줄 수 있는 생활 종교가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종교적 신념이 없고 윤리적 근거가 없는 곳에 고도의 윤리성을 전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단순한 생활 기술이 아니고 민주적 생활 철학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책임을 동반
민주주의의 근거는 지극히 신학적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침범할 수 없는 존엄한 인격을 타고나며 이 인격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모든 행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그리스도교의 인생관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
이런 그리스도주의의 전통이 서 있지 아니한 곳에서 민주주의의 형식만을 모방하기 때문에 모든 후진국의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서 자행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바로 다수결주의라고 생각하고 책임을 동반하지 않는 자유를 구가하고, 인류의 공동과 국가의 공익을 무시하는 이기주의가 이런 혼란을 초래한다.
인생관을 깨우치는 종교도 갖지 아니하고 객관적인 윤리 규범도 갖지 않고 목전의 현실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물질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부정 부패는 빈욕의 소산
한 인간의 사람됨이 어떠한가보다 그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인간이 평가되는 현상은 소유가 존재를 선행하는 부조인데 오늘 한국 사회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가치의 전도현상이다.
여기서는 금전이 지상의 전능한 신이다. 인간의 소유욕은 본능에 속한 것이기에 윤리적 차원에서 이 소유 본능을 조절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다. 물질의 노예로 가득한 사회에는 약육강식과 부정부패의 만연이라는 현상이 불가피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사치 허영과 쾌락주의와 부정부패가 범람하고 있는지는 재삼 부연할 필요가 없으며 이런 유물론적 사고방식은 정신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을 멸시하는 풍토를 조성한다.
이런 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쉬운 것, 편한 것, 재미나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어렵지만 가치 있는 것, 불편하지만 귀중한 것, 재미없지만 필요한 것, 화려하지 않지만 유익한 것에 대한 관심을 말소시켜 나간다.
이렇게 물질에 탐익하면 부정을 낳고, 부정이 횡행하면 불신을 빚어내고, 불신이 깊어지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불안이 만연되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롭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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