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어느 봄날 황해도 포내본당 주임 프랑스인 손(BOUYSSOU) 신부와 그곳 군수 가장터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 지방유지인지라 평소 친분이 있는 사이. 검은 수단차림에 근엄한 표정으로 장터를 산책하던 손 신부, 군수를 만나자 반가운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넨다.
『군수 너 오랜만이다 밥 먹었니』
이 손 신부란 양반이 평소에도 누구에게나「너」이고「해라」를 하는줄은 알지만 사람이 들끓는 장터 한복판에서 이런식의 인사를 받고나니 군수의 표정이 굳어지고 심기가 편치 않을수 밖에.
대답을 잃고 물끄러미 신부를 쳐다보는 군수에게 손 신부는 좀 미안한듯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군수 너 골났니. 저녁에 우리집에 놀러 오너라』
어물어물 헤어진후 집으로 놀러오라는데 안가면 섭섭히 생각할까봐 군수양반 저녁때 신부를 찾아갔다.
반갑게 손님을 맞는 손 신부 낮에 일을 사과나 하는듯 손수 술을 따라주며 하는 말.
『군수 나는 해라밖에 할줄 모르지만 너는 다 할줄 아니 너도 이제부터 나보고「해라」해라』
오랜 박해에서 벗어나 생기를 되찾고 곳곳에 성당과 공소를 지어 기반을 굳혀가던 1920년 이전, 당시 서양신부들의 이 같은「해라」식의 말투는 숱한 일화를 남겼다
환갑이 지나 손자를 본 노인에게도 거침없이「해라」를 하는 신부나 이를 받아들이는 신자 사이에는 아무런 어색함이 없었지만 비신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어색한모양. 서양신부 특히 한국에와 양반행세에 양반말투를 쓰지 않을수 밖에 없었던 프랑스 신부들의 「해라」는 한국교회가 자라온 특유한 환경이 낳은 산물이었다.
천주학쟁이 중에서도 서양신부를 잡기에 혈안이 된 관헌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선 변장이 필요했고 변장중엔 상복(喪服) 차림과 지체높은 양반차림이 그 중 안전했으므로 차림에 따라 자연이 말투도 양반말투로 바꿀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박해시 신자들은 신부는 곧 하느님의 대리자이며 엄친(嚴親)과 동격이라는 철저한 관념에서 절대적인 복종을 바치는데 자연스러웠고 신부는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않았다.
따라서 서양신부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줄 때 상류계급의 말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으로 알아 존대말은 아예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이 아는 한국말은 지체높은 양반의 하대(下待)말 뿐이었다.
대개 30세 전에 한국에 와 20~30년씩 읽힌 말이 하대말이고 보니 대부분의 서양신부들은 포부내 본당의 손 신부처럼 존대말을 몰라『너도「해라」해라』하고 변명할수 밖에 없었던 때가 1920년대 이전까지였다.
그러나 1919년 기미 독립만세 운동 이후 점차 민권과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가면서 성직자들의「해라」는곳에 따라 저항을 받게 되었는데 1919년 평양의 李바오로라는 6순의 신자는 여나믄살난 손자 앞에서 곰방대로 머리를 얻어맞으며「몹쓸 녀석」이란 욕을 먹고는 분통이 터저 이사를 가고만 일이 있었다. 성직자들의「해라」는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사라져가 1920년대 중반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들어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것은 서양신부들이「말씨 개선」노력과 한국인 사제들이 배출되기 시작한데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 배출된 한국인 사제들이 전혀 하대말을 안쓴건 아니고 어떤 신부는 서양신부보다 한술더 떠 지독한 욕을「보너스」로 곁들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성직자와 신자 사이의 엄격한「父子관념」과 앞에서 본바와 같이 수십년간 하대말이 몸에 배인 서양신부들 밑에서 12년간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히 배우고 익힌데서 찾아볼수 있다.
이 하대말에 대한 교회의 처음이자 마지막 조처가 있은 것은 1920년 봄이었다.
당시 교구장 뮈텔 민 주교 앞으로 황해도 해주본당 신자들이「진정서」를 보낸 사건이 있었다.
신부님의 하대말이 여러모로 부작용이 많으니 존대말은 어려워도 듣기 거북하지 않은 말씨를 쓰도록 권유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를 받아본 민 주교는 전국의 신부들에게 존대말을 쓰도록 노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후 경기도 수원근교의 한 본당에선 웃지못할 일이 일어났다.
평소 강론때도「해라」를 하던 본당 신부가 어느주일에『신자여러분…해야 합니다』하고 존대말을 쓰자 회장 이하 신자들은 우리 필시 무슨큰 잘못을 저질었기에 저 양반이 비꼬느라고 존대말을 쓴다고 생각, 미사가 끝나자 일제히 성당문 밖에 멍석을 깔고 엎드려 사죄를 비는 바람에 본당 신부는 사유를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했던 것.
신자가 신부에게 문안 드리면서『죄인 아무개 신부님께 문안드립니다』했고『제가…했습니다』『그렇습니까』하는 식으로 신자와 대화하던 병아리 신부가 선배신부로부터『교우보고「제가」하다니 신부의 위신이 뭐란말이오』하는 호된책망을 듣는 건 보통이던 때였지만 신부와 신자는 영신생활은 물론 딸애 시집보내는일까지 내 일 같이 의논하는 따뜻한 인정속에 서로를 믿고 지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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