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72년을「정의, 평화의 해」로 정하고 그 실천 방향을 구현하고 있음과 때를 같이하여 서울교구는 금년 사순절 기간 동안「사회 정의와 평화」란 주제로 여러 주교들을 초청, 강연회를 열고 있다. 사순절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반부터 5시 반까지 명동성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 강연회에는 모두 6명의 주교가 강연을 맡게 된다. 다음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의「왜 교회는 정의를 말해야 하나?」에 대한 강연초를 소개한다.
천주십계의 제7계「도둑질하지 말라」는 바로 정의에 관한 계명이다.
즉 남에게 빚진 것은 갚아야 하고 손해를 끼친 것은 보상해야 하고 고용인에겐 정당한 품값을 제때에 줘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정의는 주로 개인 대 개인의 정의, 즉 교황 정의였다.
근래에 와서 교회는 사회 정의 또는 가톨릭 사회 원리를 가끔 천명하고 있다.
사회 정의라는 것은 사회의 공동선 전반에 관계되는 넓은 의미의 정의를 말하며 근대에 이르러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산업 조직이 크게 발전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정의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의문제가 한 사람 對 한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업주 측과 수천 명의 노동자들, 나라와 나라 사이, 특권층과 서민들 사이의 문제로서 사회적인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지금까지도 제7계의 간단하고 기본적인 정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교회가 그보다 규모가 큰 사회 정의를 부르짖으면「왜 교회가 정의를 말해야 하는가?」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사회 정의를 말하자면 당연히 사회 불의를 말하게 되고 불의를 얘기하면 그것이 고발처럼 들리게 되니 이에 대한 변명 내지 항의가 일어날 수도 있고『그런 것은 정치가와 경제인에게 맡겨라』면서 정의문제에 대한 교회의 적격성을 따지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불의를 고발하는 것은 공산주의나 또는 혁명에로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품기도 하는 반면, 많은 사람들은 종교가 사회의 양심이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케케묵은 설교 따위는 이제 듣기도 싫으니 즉각적이고도 결정적인 행동을 하자고도 요구한다.
「왜 교회는 정의를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왜 교회는 불의를 고발해야 하는가?」또는「사회 정의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라고 본다.
필리핀의 경우 4백 년 전부터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국민의 90% 이상 명색이 천주교 신자들이면서도 약 50명의 부호가 국가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 그래서 학생 데모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데 데모의 동기는「그동안 천주교는 뭘 했으며 지금은 뭘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교회가 정의를 말하는 것은 정의가 하느님 나라 건설에 필수적이고도 근본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 건설은 교회활동의 목표요 본질이다. 이 나라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으면서 완성될 것으로 믿고 있는 우리는 지금부터 이 세계 안에서 진리와 사랑과 자유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고 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사업을 위해 그 주도적 역할을 교회에 맡기셨다고 믿고 있다.
완전한 정의의 실천은 사랑에 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사랑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정의를 말할 땐 이 같은 그리스도인적 애덕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왜 교회는 정의를 말해야 하는가?」고 묻는다면 우선「교회는 사랑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 복음의 법을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네 천주를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이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모든 인류 동포에 대한 사랑에로 인도할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다. 교회는 이 의무를 신자들에게는 권위를 가지고 이행할 것이고,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인 교회 밖의 사람들에겐 인도적인 정신을 깨우쳐 줌으로써 이행한다.
예수의 일생은 의를 위한 수난의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산상성훈에서 그는『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니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선구자인 요한 세자는 헤로데의 불의한 행동을 질책하다 죽음을 당했고, 예수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온갖 위선과 불의를 엄히 힐책함으로써 미움을 샀고 마침내 불의한 판결에 희생되었다. 그리스도로부터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전파할 사명을 맡은 교회도 언제나 정의를 부르짖어 왔다.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레룸 노바룸」은 근대산업 발전에서 야기된 소유권과 자본과 노동에 있어서의 정의문제를 다루었고, 교황 삐오 12세의「과드라제시모 안노」는「레룸 노바룸」반포 40주년을 맞아 그 원리를 부연시켜 1930년대의 사회문제에 적용하였으며, 제2차「바티깐」공의회가 반포한「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교회와 현대 세계의 대화를 촉구하고 정의의 실천으로 세계 구원의 책임을 각성시켰으며, 요한 23세의「지상의 평화」는 인권에 대한 대헌장이며「어머니와 교사」는 국제 간의 정의문제를 주로 다루었고, 교황 바오로 6세의「민족들의 진보」는 국제 정의를 부연하면서 진보 발전의 권리에 대해 해설했고「레룸 노바룸」80주년을 기념한 바오로 교황의 교서「옥또제시마아드비엔스」는 정치적 활동에 대한 지침을 요약해 주고 있다. 정의에 대한 우리의 간여는 우리의 신앙의 표현이며, 세상의 불의를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불의의 고발은 우리 자신의 생활의 표현이 되고 우리의 계속적인 행동 안에서 실천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의 활동 양식과 재산의 소유 및 생활 체제가 정의로운가를 먼저 스스로 반성해 봐야 한다. 교회가 정의에 대하여 증언을 할 의무가 있다면 교회가 먼저 모든 사람의 눈에 정의로운 자로서 비쳐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의 활동과 말과 생활로써 공의하신 하느님의 목소리가 돼야한다. 교회가 말로써 정의를 가르치지 않거나 생활로써 정의와 사랑의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 주지 못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신임을 얻을 수가 없다.
오늘의 교회가 이처럼 세계의 정의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가지는 시대적인 이유는 ①현대인들의 인간 유대와 정의에 대한 자각과 ②전보다 규모가 크고 또한 제도화된 갖가지 불의와 부조리가 만연돼 있는 현실 때문이다.
교회는 사회 정의를 말함으로써 사회 부조리에 대해 기술적이고 구체적인 해답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 경제 정치문제에 대한 근접적이고 구체적인 참여는 편견과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교회는 모두가 인정하는 불의와 부조리를 강력하게 고발하지만 그것은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의 협력을 위한 것이고 소리 없이 억압 당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자는 것이다. 어느 누구를 단죄하거나 공박하기보다는 모든 이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이가 인간의 품위와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이상적 사회가 건설될 때까지 세상의 불의를 지적하며, 정의의 구현을 위해 호소하고 실천적 행동으로써 가능한 모든 협력을 제공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옛날의 철인은『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였으나 오늘의 교회는『평화를 원하거든 정의를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전쟁은 파괴와 증오를 남기지만 평화는 번영과 행복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정의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사명에 충실치 못하면「진리의 창고」에 불과한 죽은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정의를 말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임 받은 교회의 절대적인 의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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