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 어머니가 회사에 되돌아갔을 때는 대부분의 사원들이 퇴근한 후였다. 경수 어머니는 그날 일을 정리하고 경리과장에게 월말로써 사직하겠다는 것을 말했다. 경리과장은 갑작스러운 경수 어머니의 말에 적지 않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경수 어머니는 오늘 있는 일들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남에게 자기의 결점을 드러내보이는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직하는 이유를 단지 가정 사정 때문이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경수 아버지의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 근처에 있는 무궁화다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회사를 나선 경수 어머니의 발길이 몹시 무거웠다.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하얗게 차가운 불빛을 던지고 있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경수 어머니는 경수 아버지의 태도가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자기의 잘못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또 자기에게 돌아올 어떤 채찍이라도 달게 받을 마음의 준비는 돼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방 문을 안으로 밀고 들어서자 음악소리가 요란스러웠다. 퇴근 때라 다방 안은 빈 자리가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빈 자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 안쪽에서 손짓하는 경수의 아버지를 발견했다.
『왜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앞자리에 앉으려 하는 경수 어머니의 좀 굳어진 표정을 바라보며 경수 아버지는 약간 웃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경수 어머니는 가슴이 떨렸다.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저하다가 오늘 있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뭐 경수가!』
경수 아버지는 놀란 소리를 질렀다.
『그것 봐요』
오늘과 같은 결과를 자기는 미리 생각했지 않았느냐는 듯이 툭 쏘아댔다.
『그러니까 당신이 직장을 나가는 걸 반대한 거요』
화난 소리로 덧붙였다.
경수 어머니는 할 말이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경수 어머니가 경수 아버지는 가엾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월말까지만 회사에 나가기로 했어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경수 아버니는 말없이 담배 연기만 내뿜었다.
『잘 했어요』
한참 뒤에 경수 아버지는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어요』
『누구의 잘못이건 가릴 것 없이 일찌감치 알게 된 것만도 다행인 줄 알아요.
이제부터 잘 하면 되겠지요』
경수 아버지는 일찌감치라고 했으나 경수의 비행이 빨리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경수 아버지는 어머니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매우 관대했다. 경수 아버지는 이제 떠들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건데 아이에게 너무 야단치지 마셔요 모든 게 나한테 원인이 있는 건데…』
『아이가 그 정도로 돼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니 참…』
경수 아버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서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경수 어머니는 앞에 놓인 커피도 들려고 하지 않는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좀 기다려요 회사에 가서 치울 걸 치워 놓고 올 테니 집으로 함께 가요』하고 경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수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에 닿은 것은 일곱 시가 넘어서였다.
경수 아버지는 대청에 올라서자 건너방의 문을 열었다. 경수는 가정교사 형석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형석이 왔니』
하며 경수의 태도를 살핀다. 경수는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럼 형석이 수고해』
문을 닫고 안방으로 갔다. 경수는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가정교사인 형석이의 설명이 하나도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석이가 돌아간 후 경수는 안방에 불리어 들어갔다.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머리를 숙이고 쪼그리고 앉은 경수는 가슴이 떨리고 겁이 났다.
고양이 앞에 놓인 쥐나 다름없다.
『경수야 난 네가 이 세상 어느 집 아이들보다 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엄마가 말하는 걸 듣고 난 얼마나 놀라고 실망했는지 모른다. 네가 설마 부모의 눈을 피해서 오락장 같은 곳을 출입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할 때 네가 그렇게 된 건 너의 잘못만은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아버지는 잘 알고 있다』
경수는 아버지 앞에 나가기 전까지 아버지가 몹시 엄하게 책망을 할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버지는 부드러운 말씨로 너그럽게 대했다. 경수의 뺨에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그러한 경수가 얼마나 가엾게 보였는지 모른다.
『경수야 울지마 울긴… 그래서 너의 엄마도 월말로 직장을 그만둔다. 널 잘 해주려고 엄마가 직장에 나간 것이 오히려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 왔으니 너에게 미안하다. 이제부터는 엄마도 집에 있을 거고 나도 너에 대해서 관심을 더 가질 테니 그리 알고 잘 해보자. 알았지?』
경수는 서러워졌다. 소리를 내고 울기 시작했다.
『자 울지 말고 아빠 말 았았지?』
『네』
경수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훌륭하게 생각되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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