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여하는 이유는 사회문제가 동시에 윤리문제인 까닭이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이는 교회의 영신적 고립주의를 설교한다. 교회는 사회악에 대해 불참여하면서 신자는 완덕을 향해 개인적 영신 발전에만 전념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사회 정의의 포기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요 비사도적이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그 운명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문제를 다루는 경우 교회는 정치적 또는 경제적 수단 방법을 통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윤리적 가르침을 통해서 행동할 뿐이다.
선의의 인간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받는 경우 사회제도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계혁할 의무가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안에서 인간의 위치 경제생활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의 촛점이요 물질은 인간에게 봉사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따라서 경제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에 봉사하도록 조직돼야 한다.
사회경제 분야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사회적 덕성에 관한 것이다. 인격의 존엄성ㆍ사회의 본성ㆍ경제 사회의 목적을 존중하는 행위의 습성을 사회적 덕성이라 하며 이 덕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의덕과 애덕이다.
의덕 즉 정의는 인간 존엄성에 직접 봉사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①법적 정의 ②분배 정의 ③교환 정의 등 세 가지로 구분한다. 법적 정의는 개인의 사회에 대한 정의, 즉 개인의 모든 행위는 각 개인의 목적뿐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분배 정의는 사회와 사회 지도자의 각 개인에 대한 정의로 사회 구성원에게 선익과 부담의 공정하고 균형 있는 분배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적 정의와 분배 정의는 방향이 반대다. 전자는 개인의 사회에 대한 의무를 말하고 후자는 사회 속의 인간이 가져야 할 권리를 강조한다.
교환 정의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개인들 사이에 있어서 권리와 의무를 분명히 규정하는 것으로 엄격한 뜻의 정의를 말한다. 교환 정의의 의무를 지는 당사자는 개인ㆍ법인ㆍ사회가 될 수도 있다. 교환 정의는 두 개의 온전히 구별되는 인격 사이에 동등의 관계를 갖는 것. 즉 각자에게 속하는 것을 그 본인에게 들려 줘야 한다는 말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불행하게도 정의의 문제가 너무나 자주 무시되고 있다. 오늘날『부정부패』라는 말이 보편화된 사신이 이를 증거한다. 한때는 교환 정의에만 전념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나마 너무 좁게 규정했었다. 근래에 와선 분배 정의를 사회문제에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 같은 세 가지 형태의 정의에 대해 좀 더 부연하면 이론의 여지가 없는 교환 정의의 실례는 부채다. 중세기 신학자들은 利子 지불을 정의에 포함시키지 않고 원금만 상환하면『동등』이 유지된다고 여겼다. 그 당시는 돈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돈을 잠재적 생산 자본으로 간주한다.
교환 정의의 신학적 적용에 대한 현대적 실례는 생활보장 임금을 지불할 의무에 관한 것이다. 노동자에게 그 자신과 그 가족을 합당하게 부양할 임금을 주는 것이 엄격한 정의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신의와 정직만으로는 경제생활의 혼란을 해결하지 못하는『현실』이다. 그러므로 사회 자체가 병들었을 땐 사회악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분배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국가 통치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 현대 신학자들은 사회 입법과 공공 보조금을 논하고 있는데, 선익 분배는 산술적 동등에 기초를 두지 않고 각자의 필요성과 특수환경을 고려한다. 근래에 와서 분배 정의는 국가 이외의 사회에도 적용되게끔 되었는데 특히 국가에 의한 선익 분배는 현대 경제생활에서 매우 중대하다. 예컨대 서민주택을 위한 보조금 농촌지역의 공공병원을 위한 보조금 등등과 소득이 많을수록 소득세율을 높이고 사치품에 대한 세율을 높이는 조치들은 분배 정의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기업체에 융자할 때『특혜』라는 말이 덧붙는 것은 분명히 분배 정의에 어긋난다.
성 토마스는 정의를 두 가지로 구분, 사회관계나 객관적 규범을 뜻하는 전반적 정의(법적 정의)와 이 규범의 주관적 표현인 특수 정의로 나누었다. 성 토마스는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 주려는 항구한 의지의 습성이라고 묘사했다. 후세 사람들은 법적 정의의『법적』이라는 말을국가의 설정법으로 오해함으로써 이 술어가 사회 정의라는 말로 바뀌고 사회 적선과 공동선을 대상으로 삼는 정의를 뜻하게 되었다. 교황 삐오 11세는 그의 회칙『과드라제시모 안노』에서 사회 정의를 처음으로 규정, 인간활동에 의해서 생산된 재물의 공정한 분배를 분명히 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조직이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분산된 개인들의 상대적 무능성을 고려할 때『모든 기업주들이 건전한 인간관계 계획을 갖는다면 노동조합이 필요 없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말이다.
특히 오늘의 윤리적 분위기는 이기주의적 개인주의로 흐르고 있다. 극단적인 실례는 부정식품과 부정약품 같은 것으로 무절제한 배금사상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까지 유린하려 드는 것이다.
이 같은 오늘날의 중요한 사회문제는 주로 결함 많은 사회제도에서 온다. 사회 정의는 이러한 제도와 사회의 윤리적 분위기가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리는 자기가 속한 단체가 정의로운 단체가 되도록 영향을 끼칠 의무가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새로운조직체를 구성하고 새로운 관습을 조성할 의무도 있다. 공동선과 개인적 선의 관계는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와 비슷하며 어떤 개인적 목적은 기능을 잘 발휘하는 단체 안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국가는 그 자체로 충족한 목적이 아니고 모든 이의 선을 증진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국가만이 공동선의 보호자는 아닌 것이다. 한편 개인주의는 공동선을 개인들의 선의 총화로만 간주하는 잘못을 범한다. 하느님만이 최고 최상의 목적이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만물은 모두 하느님이라는 목적에로 가는 수단일 뿐이다.
사회 정의가 요구하는 것은 각 개인이나 단체가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해야 할 적합한 행동이다. 이 행동에는 개인의 선을 전반적인 복지에 종속시킬 의향과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직과 협력이 요청된다. 교회는 교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오직 모든 국민의 복리를 위해서 올바른 길을 제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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