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유지하는 교무금을 헌납함은 우리의 본분이요 의무이다. 이 의무를 궐하거나 등한히함은 죄가 안될수 없다. 그럼에도 신공범절 등 수계는 열심히 한다 하면서도 교무금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자가 많이 있는데 이런 자는 일반적으로 볼 때 신문교우(新門)』보다 구교우 (旧敎友) 중에 더욱 많은 것은 통탄할 바이다. 이런 교우들은 재래습관 때문에 교회 유지는 으례 구미(歐美)사람들 힘으로 되는것이어니 하는 비루한 의뢰심으로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대체 이렇게 하여도 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자는 나오라! 그래 천주의 성혈로 창립된 교회에 대하여 언제까지나 이처럼 냉담한 무딘 양심을 가지고 나가려는가.』
1942년 경향잡지 5월호 사설(社說)「진실한 열심과 교무금」의 한 구절이다.
30여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 한국 가톨릭의 한 모습을 질책(질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한국교회가「교무금」(敎務金) 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20년경 부터이고 그 전엔 지방에 따라 공비전(公費錢) 판공비(判公費) 공소전(公所錢) 등으로 불리워 왔다. 한때는 (1921~1925) 교회자립을 위해 신자 가정마다 쌀 한숟가락씩을 줄이는 성미(誠米)운동을 전개한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교회 유지를 위한 신자들의 참여가 타종교인들에 비해 낮았던 것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1910년 경향잡지는 회보(會報)란에서『거년 한국 예수교인들이 교회를 위해 낸 돈이 22만5천8백89환13전인데 천주교인이 여러모양으로 (미사전ㆍ공소전ㆍ다른돈) 낸 것은 겨우 6~7천환밖에 안되니 교우 가정은 각(覺)할지어다』고 관심을 환기시킨 일이 있다.
교무금의 역사는 초기교회부터 비롯된다. 신부를 모셔올 신자를 중국이나 만주로 보낼 때 신자들은 쌀이나 돈을 거두어 노비에 쓰도록 했고 박해시는 몰래 방문하는 신부를 며칠간이나마 모시는데 필요한 경비를 서로 염출해서 사용했다.
이러한 관습은 계속돼 신교 자유를 얻은후에도 본당이나 공소 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쌀이나 돈으로 모아 보태오면서「공소전」으로 불리웠고 이「공소전」은 일년에 두차례(부활ㆍ성탄) 있는 공소 판공성사때 거두어지곤 했기 때문에「판공비」로 불리우기도 했다.
액수는 지금처럼 등급(等級)을 나누어 형편에 따라 정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 대인고해자(大人告解者) 1인당 연 얼마씩 일률적으로 책정, 본당은 신부나 회장 책임 아래 공소는 공소회장 책임 아래 두어 결산을 보곤 했다.
그러나 이 교무금이 어느 한 곳 제대로 거두어진 곳 없어 공소회장은 판공때만 되면 성사 독촉과 함께 판공비 독촉도 겸해야 했는데 좀 부유한 공소회장은 아예 자기가 다 채워놓곤 미납된 신자집에 사람을 보내『판공비 걱정은 말고 성사보러 오시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교무금 등급제를 처음 실시한 곳은 백 필립보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충남 합덕본당이었다.
백 신부는 대인고해자 1인당 연30전으로 정해진 교무금 책정이 공평치 않다고 생각, 1927년 본당 산하 공소에 공한을 보내 살림형편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거둘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이듬해 공소순방을 해보니 몇몇 공소회장들이 등급제를 실시하면 부유한 편인 자신들이 더 내야 할 것을 우려, 등급제를 기피하고 있음을 발견하곤 대노하여 성사를 막아버리고 말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공소회장들은 서둘러 등급제를 실시했고 다음해 결산을 해보니 신자들이 형편에 따라 골고루 냈기 때문에 전체액수는 전년에 비해 3배나 늘어났다. 합덕본당의 등급제 실시 결과를 본 교구장 뮈뗄 민 주교는 전국 본당에 대해 등급제를 실시할 것을 지시, 이때부터 각 본당이 등급제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등급제 이후 1930년대 중부지방의 교무금 액수를 보면 대개 쌀1말에서 3말 사이로 형편이 좀 나은 가정이 연 3말이고 대개 1말 정도가 많았다.
그러나 등급제가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힘대로 내면 되는 것』정도로 교무금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데 큰 이유가 있었다고 당시 본당 신부들은 말하고 있다. 합덕본당 보좌로 있으면서 등급제 실시를 돕다 황해도 사리원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구천우(요셉ㆍ76) 신부는 회장들을 모아 등급제의 장점을 설명한 후 실시해 보았더니 오히려 반발이 심해 얼마후 제자리 걸음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다 소위 대동아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미영자금 동결령이 내리면서 외국원조가 불가능하게 되자 서울을 비롯, 평양교구 신자들은「교구 자립운동」을 부르짖으며 교무금 납부에 대한 대대적인 계몽운동을 벌이게 됐는데 이때 유일한 교회잡지인 경향잡지는 이 운동에 앞장서 앞에 인용한 사실을 비롯, 각 처의 자립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서울교구는 종전의 교구금 징수제도를 개편, 신자가정은 매호 연수입의 1백분의 1을 표준으로 징수할 것과 징수기간은 연 1 내지 2회 혹은 월 1회로 하도록 하는 한편 본당 총수입의 10분의 5는 지방비로 10분의 3은 교구 본부 납입비로 10분의 2는 신부 생활비로 사용토록 지시, 긴축재정 아래 자립준비를 갖출 것을 독려했다. 교무금은 한국교회에 있어 항상 계몽의 대상이 되어왔고 지금도 뜻있는 신자들은「교무금 배가운동」을 부르짖고 있지만 반응은 별 차이 없는듯.
그것은 한해에도 몇차례씩 관헌을 피해 도망다녀야 했던 반거지 신세의 선조들을 사목하던 서양신부들이 돈 얘기는 아예 미룬채 오히려 딱한 교우는 먹여살리기도 하다보니 교회는 서양양반들이 운영하는 것이란 개념이 면면히 흘러오는 결과라고 변명하는수 밖에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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