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서는 국민으로서 또한 가톨릭 신자로서 사회 정의를 위한 우리의 사명을 먼저 성경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을 통해 고찰해 보자.
성경은『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덕을 구하시오.』(마테오 6장 31ㅡ35)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성직자는 교인들을 독촉하면 먹을 것 입을 것이 해결되니까 현실을 무시한 채 쉽게 인용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덕을 구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곧 각 사람이 의리와 의무를 다하고 남의 권리를 인정하며 진실하게 살 때 먹고 입는 일은 마땅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할 일을 다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때 잘 살 수 있다는 증거를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같은 곳에서 발견하는가 하면 정당한 인간의 권리가 무시 당하고 부조리가 횡행함으로써 못 사는 대표적인 사회를 한국 필리핀 등에서 발견케 된다.
이러한 나라엔 못 사는 대중이 있는데 반해 국가의 부는 소수의 인간들에게 독점되고 국민은 고통을 받아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또한 공동체 전체 이익을 위해 운용되어야 할 사회 질서가 이러한 생각을 가진 무리들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
오늘 한국 사회는 공동체 인식이 부족한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저지른 불행을 안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옳은 것을 구하는 성경의 정신을 따라 먼저 남을 위하고 존경하며 협력할 줄 아는 참다운 인간 자세를 확립하는 노력을 통해 평화롭고 향상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퇴폐, 물질주의가 만연된 이스라엘에서 용감히 백성들에게 옳은 것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만일 예수께서 편히 살려고 했던들 십자가의 정사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위대한 혁명가였다. 말없이 편히 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사회의 종말은 한마디로 비참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과 예수님의 행적을 본받아 의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면 의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 교회가 지녀야 할 기본 자세는 무엇인가. 교회는 어디까지나 진실을 가르치며 바른 일을 스스로 실천하고 초연한 입장에서 민족과 국가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선의의 압력단체로서 뚜렷한 자세를 갖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교회는 바른 것을 가르치며 구속기관으로서 많은 일을 해왔지만 사람이 움직이는 교회이기에 또한 많은 과오를 저지른 것도 사실이다.
중세기 교회가 이러한 사명을 망각하고 현세적 권력에 집착해서 어용교회 노릇을 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백성을 위하고 짓밟힌 인권을 찾아 주며 무지를 일깨우는 어버이로서 사명을 새로이 해왔다.
특히 교황 노동헌장「레룸 노바룸」을 통해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지켜야 할 윤리를 말했고 이를 이어 삐오 11세 바오로 6세 요한 23세 등 많은 교황들이 여러 회칙을 발표하여 인간의 권리를 스스로 깨닫는 민중 앞에 사람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명백히 하며 인류의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20세기에 와서 동구라파 여러 나라에서 소련의 비인간적 억압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중운동과 오늘날 스페인 남미 등지에서 독재와 부패 정권을 비판하고 민중을 제도하는 정신적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도 72년을「정의 평화의 해」로 선포한 주교단의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교회의 기본자세에 대해 우리나라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첫째 오늘 우리 사회는 정치적 아부 근성과 미국 일본의 영향을 받은 물질주의 향락주의에 젖어 있다. 사실상 독립을 해본 일이 없는 민족사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오는 동안 비굴과 아부근성을 낳았고 세력에 줄 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불의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용기와 의욕조차 잃고 말았다.
또 국가의 현실과 처지를 망각한 물질과 향락주의는 건전한 가치와 윤리마저 흔들어 놓고 있으며 근대화의 허구 속에 바탕 없는 사치풍조만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적 방법적 모순이다.
능력에 앞서 죽을 생각하고 민족 자본을 키운다는 미명 아래 무계획한 차관으로 나라는 빚더미 위에 앉게 되었는데도「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사는」엄청한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농촌의 파탄을 초래한 무계획한 외미 도입, 언론의 구속, 학권 자유 박탈, 격심한 빈부 차, 외유로 표현되는 국회의원들의 한없는 낭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언론을 구속, 잘잘못을 자유로이 말하지 못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라는 이 풍토를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가톨릭, 비가톨릭인을 막론하고 이러한 부조리에서 탈피, 정의의 사회를 세워 나가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지워진 지상명령 즉 사명은 자명하다. 먼저 우리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다.
권력에 줄 타 재산이나 늘이는 교회, 고용인에겐 3~4천 원의 월급을 주면서 거액을 헌금하는 가짜 교인은 필요없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보다 정말 교회가 무엇이며 무엇을 가르치며 실천해야 하는지를 깨닫는「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산 신앙 위에 인간의 평등과 생존권을 인정하며 무지의 타파에 앞장서야 한다. 특히「배운 자의 무지」를 깨우치는 데 과감해야겠다.
그리고 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구별, 바른 일 바른 말을 하는 데 비겁하지 말며 잘못을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말며 변명하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되겠다.
우리의 사명은 전체 인류가 각각 자기 권리를 찾아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정의 사회 건설에 앞장서며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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