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만물을 소생시키는 화창한 봄철과 함께 우리는 다시 구세주 그리스도의 부활축일을 맞이했습니다. 부활의 빛과 은총 그 기쁨이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충만하기를 기원해마지 않습니다.
부활은 인간과 세상의 참되고 영원한 소생(蘇生)입니다. 전 인류가 하느님의 자녀로 속량됨으로(요한 1ㆍ12)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사랑의 일치속에 한 가족과 같이 영원히 사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도록(교회헌장 4참조) 성자 그리스도는 강생하셨고 죽으셨고 부할하셨습니다. 이 완성은 물론 우리의 사후(死後)와 세상 종말 즉 영원에서 이룩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활력(活力)과 그 의미는 결코 사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것이 아니고 이미 현실의 삶 속에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부활하신 제일 큰 목적은 성신으로 충만한 영화(靈化)된 몸으로(1고린토 15ㆍ44 참조) 우리 안에 보다 깊이 강생하시고 우리와 결합하여 우리 역시 성신으로 충만한 영적 몸으로 새로이 태어나고 당신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당신의 독생성자를 보내셨습니다. (요한 3ㆍ16 I요한 4ㆍ9 참조) 강생하신 성자 그리스도는 만민을 죄와 죽음에서 속량하기 위해 수난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이 취하신 인성 안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에게 그 존엄한 품위 새롭고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로마 6ㆍ3 갈라띠아 6ㆍ15 Ⅱ꼬린토 5ㆍ17 참조)
인간 회복, 모든 부정과 불의 죄와 죽음에서의 인간 해방- 그것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 부활의 참뜻이요 그 목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증거하기 위해 사도들을 뽑으시고 당신을 부활시키신 같은 성신을 그들 위에 보내어 교회를 세우시고 성신과 함께 저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언제나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사도행전 2ㆍ32, 3ㆍ15, 4, 1ㆍ3, 5, 29ㆍ32) 그리스도께서 성신을 통하여 당신들 안에 사시고 당신들과 함께 구원의 사업을 수행하심을 죽기까지 증거했습니다. 이 사명을 계승하는 것이 오늘에 이르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진실로 오늘의 세상을 살리고 오늘의 세상을 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바로 세상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몸입니다. 우리는 미사 집전 때『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축성하는 빵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깊이 묵상하면 그 말씀의 뜻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자인 우리들 교회 역시 성체성사를 나눔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의 몸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게서는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의 몸인 이 교회를 인류 앞에 내어놓고『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동시에『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내 피의 잔 너희와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이니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열려진 가슴에서 나왔습니다. (교회헌장 3 참조) 그로 인해 교회의 가슴, 교회의 심장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수족(手足)에는 십자가의 상흔이나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교회는 물론 모든 이의 교회이고 모든 이를 위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불우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가장 긴밀히 일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교회와 우리 모두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특히 그 가운데서도 가장 불우한 이웃 안에 굶주린 자 헐벗은 자 병든 자와 고통을 받는 모든 이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만일 이들 가난한 이웃 안에 그리스도 계심을 모르고 혹은 이를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이는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굶주린 자 억압 받는 자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입으로만「주여, 주여」하는 자들이 될 것이고 마테오복음(25, 41∼44)에서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신 그 저주와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이 말씀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이며 참된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신 그 비유(루까 10, 25∼37)에서 잘 설명해 주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제관이나 레위 사람이 아니었고 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심각히 우리 자신의 실생활에 비추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다 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 교회의 본래의 정신은 무엇인지 이 시점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교회는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또한 땅의 소금 세상의 빛 누룩인 교회입니다. 무거운 짐진 자의 짐을 덜어 주는 교회,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묶인 이에게는 해방을, 소경에게는 광명을, 억압된 사람에게는 자유를 전해 주는(루까 4, 18-19 이사야 61ㆍ1) 교회입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만한 사람을 가진 교회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교회 진리를 증거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인류 구원을 위해 함께 가는 교회입니다. 포괄적으로 말하여 남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요, 그 정신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제자들과 교회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될 때 교회 즉 우리는 참으로 이 역사 안에서 이 겨레와 인류 사회 안에서 진실로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 인간과 겨레와 세계를 참되게 구해 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교회는 이러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한국 교회는 무수한 순교자들의 후예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열들의 순교정신이 그리스도의 정신이 우리 안에 얼마나 살아 있는지는 진정 의문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날 우리 겨레와 사회는 교회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답게 자신의 사명을 다해 줄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교회 본연의 사명에 충실할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의 구석구석에까지 인간 회복 즉 부활을 증거하고 이룩해 감으로 이 국가 사회 전체가 진실로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이바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에 대처할 뚜렷한 방향과 국민적 정신 정립(精神定立)을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국민 총화 내지 전체 국민의 정신적 단결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결여된 가운데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민족적 슬기가 요청됩니다. 하지만 이를 낳을 정신과 지성이 사실상 봉쇄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허탈과 체념에 빠진 것이 오늘날의 한국의 정신계 내지 지성계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포애가 아주 메마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대다수는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습니다.
나라에서 주도(主導)하는 일엔 무엇에 대해서든지 심지어 자체로서는 좋은 일에 대해서까지 수동적이요 소극적인 추종이거나 아니면 무반응입니다.
이같이 국민의 참여의식이 결여된 상황, 참여하고 싶어도 하기 힘들게끔 유형 무형의 물리적 힘으로 제약된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때에 만의 일이라도 북괴의 남침 또는 어떤 예기치 못한 사태의 폭발로 정작 비상사태가 일어난다면 우리의 국가 존망(國家存亡)이 심히 우려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현재의 상황은 우리의 국가 사회를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참으로 부강(富强)케 하는 길은 겨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상태는 오히려 국력의 바탕인 국민이 민주 역량을 저해는 할지언정 그 성장을 돕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상태가 무한정 지속될 때에는 집권자와 국민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더욱더 멀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지도자 없는 국민 국민 없는 지도자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위기에 우리는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현재에도 정부와 국민 사이에는 분명히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거리를 메꿀 수 있는 매개체(媒介體)조차 불행히도 없습니다.
그러한 매개체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언론(言論)과 국회(國會)는 사실상 약화되고 이제는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정부와 국민 간에 또는 사회 각 계층과 국민 상호간에 이른바 대화(對話)만이 아니라 마음의 소통(疏通)이 단절되어 있다는 불행한 사실을 솔직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같이 정신적 구심점(求心点)을 잃은 현실 상황 속에서 위정 당국은 거듭거듭 강조하는 국민 총화와 총력 안보를 무엇을 바탕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의문시되고 우려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이처럼 어둡고 침체된 우리 겨레와 사회를 위해 특히 이 난국에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교회도 무사(無事)와 안일(安逸)을 위해 침묵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또는 위정당국이 하는 일에는 무조건 찬동하고 따라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정부나 국민 간에 깔려 있는 이 깊은 위화감(違和感), 사회 각 계층과 국민 상호 간에 놓여 있는 불신감을 해소하는 보다 적극적인 일을 경우에 따라서는 있을 수 있는 어떤 모험을 무릅쓰고라도 해야 하겠습니까?
어느 것이 이 시점에 국가와 사회를 위해 교회가 봉사할 수 있는 길입니까? 어느 것이 인간과 인류 구원을 위해 수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닮는 길입니까?
우리는 확실히 우리 사회와 겨레가 보다 의롭고 밝은 내일을 맞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양심과 정의가 소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위정자와 국민 및 국민 상호 간에 믿음이 소생되고 애국애족의 사랑의 정신이 소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국민 하나하나의 마음 속에 인정이 다시 샘솟아야 하며 시민정신이 다시 살아나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지역별 또는 직능별 자생단체(自生團體)들이 참으로 자립(自立) 자조(自助) 협동(協同)할 수 있는 참다운 민주적인 여건이 조성되고 부활되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즉 소생의 증거자로서의 교회의 사명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교회는 설교만이 아니라 그 행동과 실생활을 통하여 부할의 성촉(聖燭),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의 빛을 성당 안에서만이 아닌 모든 국민의 마음과 이 사회의 어두움 속에 밝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거듭 말하거니와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와 믿음의 등불을 스스로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성신의 인도로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刷新)하여 진실히 이 사회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의 몸인 교회로 헌신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의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가장 강력한 싹이 될 수 있도록 세우신 그「메시아」적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희생 수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생명과 빛에 이르는 부활의 길입니다. (교회헌장 9 참조)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때문입니다(로마 6ㆍ8 참조).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 주교들을 포함하여 한국 교회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이 정신에 자각하고 분발한다면 그리고 모든 선의의 국민들과 협력한다면 우리 겨레는 분명히 의롭고 밝은 내일을 지닌 겨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정의 없이 평화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평화를 원하면 먼저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의 교회와 우리 겨레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닌 의미요 그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최대의 사명이요 우리 사회와 국가 민족의 현실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과업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진리와 사랑과 정의의 등불을 이 어두운 세파 속에 높이 쳐들고 환히 밝힙시다.
끝으로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은총과 그 평화의 축복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온 겨레와 온 누리에 가득히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리니.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1972년 부활축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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