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을 내려가는 영호 어머니의 발걸음은 무겁다. 형일이네 은행나무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렇지!』
하며 영호 어머니는 그 자리에 섰다. 어제 밤부터 오늘 저녁까지는 물론 좀 전까지만 해도 영호의 등록금 때문에 형일이 아버지와 의논을 해보려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두워져 가는 하늘에 까만 연기를 내뿜고 있는 천 사장네 목욕탕의 높은 굴뚝에 시선이 갔을 때
『천 사장이면…』
하는 희망적인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영호 어머니는 하느님이 도와서 지금까지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러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영호 어머니는 일이 제대로 돼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형일의 아버지는 있었다. 형일이네 식구는 모드가 영호 어머니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이들은 더욱 기뻐했다. 아이들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 좋다.
『아주머니 영호 집에 왔어요?』
형일이가 물었다.
『응 집에 있다.』
『엄마 나 영호네 갔다올게』
어머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형철이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엄마 나도』
유미도 어머니의 치마를 잡고 깡충 뛰었다.
『그래그래 빨리 가거라!』
어머니는 시끄러운 것을 어서 면하고 싶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들은 우루루 밖에 나갔다. 집안이 조용해졌다.
세 사람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도 영호 어머니는 등록금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영호는 그대로 신문 배달을 하나요』
형일의 아버지가 물었다.
『네 싫단 소릴 안 하구 잘 해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주저하고 있던 영호 어머니는 속으로 잘 됐다고 생각했다. 영호의 말이 나왔을 때 용건을 꺼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 그놈 용하단 말야』
『애가 얼마나 어른스럽다구요』
형일의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영호 어머니는 말문을 열기는 했으나 계속하지 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인가 말하기 곤란해하는 영호 어머니의 태도를 재빨리 눈치 챈 형일이 어머니는
『왜요?』
하고 영호 어머니의 말을 재촉했다. 영호 어머니는 머뭇거리다가
『참 염치 없이 또 어려운 청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형일의 아버지는 영호 어머니에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데 말하셔요.』
옆에서 형일의 어머니가 거들어 주었다.
『글쎄 영호가 중학교엘 가겠다구 하잖아요』
영호 어머니는 낮은 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렇겠지요. 다들 가는 중학교인데』
형일의 아버지는 놀랄 것이나 이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형일이 아버지께 의논을 좀 하려구요.』
『그래요 어떤 일인데요』
『형일이네도 잘 알다시피 제 힘으로는 등록금은 너무 힘에 겨워요. 그래서 생각다 못해 천 사장님 생각을 해 봤어요. 그러나 제가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해서 형일의 아버지께서 절 대신해서 우리 영호의 첫 등록금만 어떻게…』
『네…』
형일이 아버지는 모든 걸 다 알았다는 듯이 말끝을 높이며 말했다.
『그런 것쯤이야… 돈만 있으면 내가 내도 좋겠지만… 그러나 천 사장은 옛 정의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 사정을 봐 주지 않겠어요!』
형일의 아버지가 선뜻 받아주는 통에 영호의 어머니는 오히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영호 어머니는 영호가 중학교에 입학만 하면 앞으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고 있다.
천 사장은 형일의 아버지와 같이 영호 아버지와는 어렸을 때부터의 친한 친구이다.
목욕탕만이 아니라 정미소며 양초 회사까지도 경영하는 실업가이다.
형일의 아버지는 첫 눈이 오던 날 집으로 가는 언덕에서 영호 어머니를 만나 지내는 형편을 들었을 때 천 사장에게 말을 하여 시장 안의 가게라도 얻어 드렸으면 하는 생각도 한 일이 있었다.
직장이 바쁜 이유도 있었지만 그동안 이럭저럭 하다 천 사장을 찾아가지는 못했다.
남들은 천 사장에 대해 여러 가지로 비난을 하고 있지만 영호네를 돕는 데는 그렇게 인색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천 사장님이 그만한 건 도와 주실 거예요』
형일의 어머니도 희망을 갖는 것이었다. 물론 형일이 아버지나 영호의 어머니도 천 사장이면 도와 주리라고 믿어졌다.
『쇠뿔도 단 김에 빼야 한다는데 당장에 가 보지 뭐!』
하고 형일 아버지는 일어섰다. 당장 가려는 것이다. 건넌방에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형일의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천 사장을 만나고 오겠어요. 아마 늦어질지도 모를 테니 늦게까지 기다리지 말고 노시다 가셔요』
『정말 미안해서…』
영호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뭘요, 이런 일쯤이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영호 어머니는 정말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형일의 아버지가 기꺼이 받아 주리라고 믿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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