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어떻게 요리하든 그것은 영화 작가(감독)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영화란 배우나 촬영 기사의 것이 아니라 감독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최근 선을 보인 최하원 감독의「무녀원」(김동이 원작)는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갈등이라는 핵심보다는 무당의 프리섹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원작이 지닌「몰락해 가는 운명의 비애」를 약화시키고 있다.
처마 밑에 방치된 어린 시절의 연, 남사당패들의 능란한 줄타기, 부확된 기왓장 속의 새끼새 등 화면의 배경에 짙게 깔린 향토 냄새는 군데군데 강조되는 주인공 모화(윤정희)의 자위행위와 더불어 깊이 있는 암시를 해주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탐미적인 효과일 뿐 내용에 밀착되지 못한 의식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주축을 이루는 세 가지 이야기의 패턴은 이웃 동네로 돌아다니며 굿을 해주고 사는 무당「모화」와 바깥 출입 없이 그림이나 그리는 반벙어리 양녀「낭이」(김창숙) 그리고 어려서 가출했다가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온 아들「욱이」(신영일)가 그것이다.
그러나「무여원」는 모화의 샤머니즘이 의미하는 한국적인 토착풍속과 욱이의 기독교가 표상하는 서구적 근대 문명의 마찰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다. 그러한 두 세계의 갈등은 어떤 방법이로든 희생을 강요하게 마련이다. 그 희생이란 바로 모화의 죽음을 뜻한다.
희망을 걸었던 아들 욱이마저 새로운 사상(기독교)에 빼앗기고 부락민들의 냉대 속에서 외로운 주술사로 타락한 무녀 모화는 신묘한 기적을 바라며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화의 죽음은 단순히 속세에서의 이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무당의 출범을 강 건너에서 방관할 수밖에 없이 지난날「욱이 아버지와 불꽃 튀기던 한때」를 강물에 어리는 달빛과 연결하는 환상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극히 여자다운 이성과의「만남」이었다.
문제는 광신적인 무당의 최후가「용신님」을 찾는 제전으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 님을 그리는 추억 속에 장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테마를 향한 끈질긴 추구보다는 부수적인 일화에 의존한 인상이 짙다. 어머니의 이질적인 신앙에 회의감을 가진 욱이와 이복동생 낭이와의 사랑의 도피행도 절실한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야기를 정리하기 위한 노파심에서가 아니었다면 원작의 의도대로 차라리 욱이가 모화의 휘두른 칼에 맞아 죽는 차원에서 매듭지어야 했을 것이다. 신영일의 1인 2역도 인물 설정상의 혼란만 가져오는 미스였고 허장강의 지난친 호색 취미의 노출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갈등이 욱이의 내면을 통해 표출되었더라면 한층 공감이 가지 않았을까. 무당의 신통력과 도취의 상관성을 정신의학적인 각도에서 파헤쳐 보려 한 연출자의 의도는 높이 살 만하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교우 최하원 감독은 전작「새남터의 북소리」와는 달리 예수의 교리를 통제하고 보다 한국적인 토착정서에 밀착하면서「화해될 수 없는 비참성의 분위기」와 근대 문명(기독교)의 대두를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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