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장안을 비롯 팔도강산이 온통 만세소리로 뒤덮힌 1919년 3월1일 오후 10시경.
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성심여상 자리에 있던 대신학교에선 개교 이래 철칙처럼 지켜왔고 누구도 범한적이 없는 「취침후 침묵」 규칙을 깨트리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대한독립 만세』『대한독립 만세』 다른때 같으면 기숙사 방마다 불이 꺼지고 누구 한사람 출입은커녕 기침소리도 누른채 죽은듯 잠들어 있어야할 시각에 때아닌 만세소리,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전교생이 일제히 창문을 열어 젖히고 악을 쓰듯 불러대는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으니 어찌 큰일이 아니랴.
그것도 다른학교라면 몰라도 규칙을 생명처럼 여기고 한치의 위반도 허락치 않는 대신학교이고 평소 호랑이 같은 교수신부들 윽박에 주눅을 못펴고 행여 품(品)이 떨어 질세라 전전긍긍하기만 하던 대신학생들이 저지른 일이고 보면 일대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한번 터진 만세소리는 이윽고 전 기숙사 방을 휩쓸어 기세를 돋구며 자정이 넘도록 계속됐다. 그 중엔 목이 쉬어 더이상 소리는 못내고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민채 두 손만 들었다 내렸다 하는 흉안의 소년이 있는가 하면 평소 그렇게 조심해 걷던 마루바닥을 꺼져라고 굴러대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누구하나 이 일로 내일 아침이면 학교를 쫓겨나리라는 불안한 표정을 짖지 않았고 또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얼마후 흥분과 열기가 가시자 이번엔 만세소리 대신 이 방 저 방 오가는 부산한 발자욱 소리, 캐비넷 여담는 소리가 새벽동이 틀때까지 계속됐다.
아침이 됐다. 엊저녁 소란으로 쫓겨날 것은 뻔한 일임을 잘 아는 신학생들은 아예 보따리를 싸논채 잠시후 떨어질 불호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교장 기낭 신부(GUINANDㆍ한국명 陳普安)가 나타났다. 『이놈의 자식들. 누가 만세를 부르라 했나. 모두 규칙을 어겼으니 퇴학이다』기대했던바 그대로다. 얼마후 교장신부의 연락을 받은 교구장 閔 주교가 와서야 이 사태는 수습됐다. 閔 주교는 학교측과 수습책을 숙의끝에 만세를 주동한 신학과 20명에 대해 그해 여름방학(6월5일~9월15일)후 등교를 금하고 이듬해 봄에 등교할 것을 명했다.
품(品)이 일년 연기되는 셈이다. 이것이 3ㆍ1운동 기간중 보여준 교회의 유일한 공식반응이었다.
3ㆍ1운동이 터지자 교구장 閔 주교는 각 본당에 공문을 띄워「만세운동에 가담하지 말것」을 지시했고 본당 신부들은 교우들에게 이 지시를 전달했다.
그러나 독립을 갈망하는 마음은 가톨릭 신자라고 다를바 없다. 교회의 이러한 지시가 신자들의 단체행동이나 비밀결사에 브레이크를 걸어 개신교신자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과감한 참여를 하지못한 것은 사실이고 지금도 가톨릭은「3ㆍ1운동」얘기가 나오면 별로 할말이 없지만 만세소리가 물흐르듯 전국에 퍼졌듯이 신자들은 각기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이웃과 함께 만세에 가담했음은 또한 사실이다. 대신학교의 높은담을 넘어 세상정세를 알려준 이는 故 장면 박사였다.
당시 20세의 나이로 수원 농림학교를 나와 소신학교에서 국어ㆍ산수ㆍ과학 등 신학문을 가르치던 장면 교사는 수업시간에 독립운동의 추이를 알려주었고 3ㆍ1운동이 터지자 『이건 천주님의 뜻이요. 독립을 찾아야 합니다. 민족의 얼을 찾도록 천주님께서 기회를 주신것입니다』고 자기 판단을 전했던 것이다. 강화도에 살던 이해용이라는 신자는 경부(警部)로 있으면서 체포 대상이 오른 독립투사들의 피신을 도와주고 독립운동 자금을 나르는 인사들을 국경 넘어까지 넘겨주었다. 또 서울교구 경리부는 상해(上海) 임시정부로 보내는 국내 운동자금을 중계해 주었는데 지방교회 신부 손을 거쳐 극비리에 송금되는 운동자금을 상해에 있는 빠리 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와 결제, 전해주었던 것. 이 일은 교구장도 모르게 이루어졌다. 당시 경기도 왕림본당 주임 김원영(아우구스띠노) 신부는 성사 잘 막기로 유명한 양반이었다. 『만세운동에 가담하지 말라』는 주교의 지시를 거슬러 교우중 오경렬이라는 20대 청년이 만세를 부르다 일경(日警)에 잡혀 죽도록 얻어맞고 나왔다.
여느 때라면 당장 성사를 막을 일이지만 金 신부는 모른체하고 넘어갔다. 그 무렵 경부선열차 안에서 한 청년이「로만칼라」를 한 안학만(루까) 신부에게 대들었다.
『어찌 천주교회 태도가 이처럼 소극적입니까』
『당신네들이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이제와서 무슨 말이요. 미리 우리에게 연락했던들 우리 천주교인들이 피흘리기를 두려워할 사람 들이요?』
安 신부의 말은 임기응변의 공박이었겠지만 당시 교회로서는『천주의 것은 천주께, 체살의 것은 체살에게…』의 원리를 고수할수 밖에 달리 처신할 형편이 못되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눈이 많다.
우선 인재가 없었다. 당시 신자수 8만8천5백41명에 한국인 신부는 늙은이 젊은이 합처 23명인데 대도시와 주요 읍내 본당은 대부분 불란서 신부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평신도 가운데도 이 거창한 운동에 불리울만한 사회적인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긋지긋한 박해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잡아 불과 20여년이 지난 때이고 보니 불란서 신부들은 또 다른 박해의 구실이 될까 두려워 자중(自重)을 요구했으리라고 능히 짐작할만 하다.
33인의 종교분포를 보면 개신교인이 16명 천도교인이 15인 불교인이 2인이다. 개신교와 천도교가 적극 가담한 대신 천주교는 사실상 뒷전에 물러앉아 소극적인 저항을 한 결과밖에 안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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