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산에 올랐다.
아침의 비를 보고 산타기를 몹시 주저했으나 모처럼의 계획에다 좋은친구들과의 산타기를 포기하기가 몹시 아쉬웠다. 소풍날의 국민학교생처럼 하늘만을 보고있는데 라디오의「오늘의 날씨」는 오후부터 차차 개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날씨예보는 반대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개기 시작한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 워낙 산으로 가고 싶었으니 말이다.
결국은 강행. 약간 늦게 떠난 덕분에 비는 맞지 않았다. 역시 날씨예보가 맞았던 것이다. 목적지는 S산, 신문지상의 등산가이드를 보면 S산은 바위가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 초입에서 우선 내 눈을 끈것은 계곡을 덮는 잡목들의 숲이었다. 그만 걸음을 멈추고
『어머 저 잡목들!』하고ㆍ내가 감탄사를 울리는 순간
『계곡이여, 뿌연 계곡이여 회색의 계곡이여!』하고 의치는 시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나무가지들이여』하고 그 싯귀는 계속 되었다. 놀랍게도 그 즉흥시인은「시인」과는 가장 거리가 먼 무식의 사나이 B씨였다. 그를 무식의 사나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까닭은 자기 전문분야의 과학서적 외에는 소설이나 시집을 한권도 갖고있지 않고 그러니 자연 한 권도 읽은 일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무식의 사나이가 잡목의 계곡을 보고 제일 먼저 즉흥시를 읊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뿌연계곡과 회색계곡은 우리의 애송하는 바가 되었다.
산을 타본 사람들은 누구나 느끼는 일이겠지만「산불」처럼 좋은 것은 없다. 불을 피워 밥을 짓는 맛도 좋고 불을 피워 추위를 쫓는 맛도 좋다. 산정에 이르렀을때 우리도 불을 피웠다. 밥을 지어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옷속으로 스며드는 쌀쌀스런 조춘(早春)의 추위를 쫓기 위해서였다. 바람따라 연기를 날리던 불이 숯이 되어 매운 연기를 거두어 버렸을때 우리는 손을 불에 내밀고 모두가 약속이나 하듯이 발아래 저 멀리로 눈을 던졌다. 그러자 누군가가 문득 이런 때의 습관처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노래는 부르다 부르다 마침내「고향생각」이 되었다.
나는 그 노래를 쏠로로 뽑는 C양에게
『C양은 고향이 있어?』하고물었다. C양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나는 숯불에 상기된 얼굴로
『나는 고향이 있어』
하고 중얼거렸다.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아? 그것도 갈수 없는 고향이 있다는 것이-』
내 말은 이렇게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이미 걷잡을수 없는 감정에 밀리운듯
『내 고향- 나는 그곳에 이미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도 좋아. 그 거리가 온통 알아볼수 없게 변했어도 좋아. 나는 다만 그곳에 가서 서보고 싶을뿐이야. 그 고장에, 그 땅에 서보고 싶을 뿐이란 말야』내 말은 끝났고 숯불 주변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자 또 나는 무엇에 쫓기우듯『그렇지만 나는 믿어, 내가 살아서 그 고향에 꼭 가리라고 믿어』하고 덧붙이고 있었다. 한가닥의 바람이 내 귓가를 스쳐갔다. 그 바람은 봄의 입김처럼 나에게 느껴졌다. 이 산의 모든 생물이 이제 피어나는 봄을 향해 몰아서 불어오는 입김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 봄의 입김이었으리라.
앞에서 나는 가지 못하는 고향을 가졌다는 것은 행복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역설이겠지. 너무도 가고싶은 나머지 억지를 피워보는 말일것이다.
오랜만에 산에오른 나는 고향을 그리는 아픔을 새삼스레 느꼈다. 그것은 산이 봄단장에 바쁘기에 아무리 기다려도 차례가 오지않는 나의 봄에 시샘이 나서 아파온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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