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는 여관이 없던 때이고 또한 그야말로 조반석죽(朝飯夕粥)일 정도로 몹시 궁색한 생활을 하던 때였기 때문에 가끔 신자걸인들이 찾아와 자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손님이 간 뒤 이가 옮아 아버님이 이를 손수 잡으시는 것을 보면서 아버님 애덕실천에 감복한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문지식에도 조예가 깊어 유교성전인 사서삼경을 읽으시고 동의보감을 거의 외다시피 하셨다.
또한 자식에 대한 정이 대단하시어 식구들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아무리 멀리 있는 약국이라도 직접 찾아가셔서 약을 지어와 환자치료에 전심전력을 다하셨다.
교리지식에도 상당히 밝으셨던 아버님은 그 당시 성경 성경직해 요리문답한자원문 천주실의(天主實義)등도 애독하셨다. 양심을 엄격히 지키시고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의를 철저히 배격하셨으며 우리 고래(古來)의 선비도와 양반도에 철저하셨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대단히 착하시고 어지신 분이셨다. 모성애가 지극했음은 물론 86세까지 비교적 장수하셨지만 일생을 완전히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 봉사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는 방직기계나 농기구가 전연 발달되지 아니한 때였기 때문에 직접 손으로 옷감을 짜거나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여러 식구들의 도움을 받으셨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을 기르시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쌈하시랴 많은 농사일을 돌보시랴 밤낮으로 노동에 시달리시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머니에게 무척 죄송스럽다.
아버지께서 어떤 돌팔이 의사에게 속아 정강이뼈를 크게 다쳐 늘 고생하셨는데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10년 동안 약을 달이시면서 병구완을 하셨다. 오랫동안 자주 약을 달이시다가 보니 나중에는 손가락이 뜨거운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실 때면 무척 마음이 아팠다.
그때는 전기주전자도 연탄도 없어 숯을 만들어 약을 달이는데 사용할 때라 어머니의 고통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1950년 어머니께서는 1952년에 두 분 다 병을 앓으시지 않고 잠자듯이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임종 날에는 비도 오지 않았는데 뒷동산에 무지개가 떴더라고 동네사람들이 보고 이야기해 주어 우리형제들은 흐뭇하였으며 매우 기뻤다.
80세에 가까운 나이인 지금도 나는 부모님의 깊은 신앙심과 무한한 애정에 감사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대구 유스띠노신학교에 입학한 나는 우선 라띤어를 공부해야했다. 그 당시는 미사집전은 물론 모든 예절이나 성무일도를 라띤어로 바쳐야했고 사제가 되기 위하여 필수전공과목이 철학 신학 성서학 예전학도 모두 라띤어로 배워야하기 때문에 전문서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라띤어 지식이 꼭 필요했다 라띤어가 어려워 퇴학당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동기생 39명 중 7명이 사제가 되었으니 그때의 신학교 교육이 얼마나 엄했고 신부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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