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의 목적
교회의 미래적 목적은「모든 사회단체나 종교적 목적을 위한 민중단체처럼 국가 속에 일정한 지위를 찾을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지상의 모든 국가가 종국에 가서는 하나의 교회로 완전히 변모하여 교회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교회가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 정의와 국가의 그것은 그 이념이 상충하는 셈이다. 만약 특정한 종교가 집권을 하게 될 때 그는 그나름의 종교적 원칙을 가지고 정의를 구현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하여 경우에 따라선 다른 종교나 종파를 탄압하는 것을 자기의 종교적 신념으로 합리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이상적인 정의 구현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도 국가적 정의에 반한다. 그래서 되는가?
그래선 안 될 것이다. 현대는 자기 이외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어떤 형태의 독선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존립을 위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한 사회 정의의 구현은 세계가 완전한 기독교 사회가 될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원칙론을 가지고 현실을 타개하려 든다면 결국 광신적인 이단배척의 전철을 되풀이하거나 배척을 당할 것이다.
■ 국가와 교회
세계를 하나의 사회로 볼 때 국가적 정의가 유토피어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것을 교회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편견과 배타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정치 참여도 다른 이념과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한다.『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교회가 되자』는 말을 뒤집어 보면 정부(국가)는 불의를 자행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단죄일 것이다. 교회의 눈으로는 국가적 정의는 정책이란 목적을 위해서 인간을 수단시하는 비휴머니즘일 것이다. 한편 국가적 안목으로 보면 균분만을 주장하는 종교적 정의는 현실에 대한 부정만 있고 발전에 대한 대안은 없는 무정부주의나 야경국가론으로 보일 것이다. 폭발하는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학에 투자되어야 할 돈을 가난한 자에게 돌릴 것을 주장하는 교회는 그실 산아 제한의 반대자가 아닌가? 결국 여러 개의 정의가 존재하는 한 원천적인 정의의 구현은 하느님의 소관일 뿐이다.
현대 교회가 부르짖고 있는 정의는 다시 한 번 검토될 필요가 있겠다.
■ 사랑과 정의의 관계
예수가 교회에 넘겨준 단죄권은 마리땡의 이른바「신적 자유」를 침해하는 불의에 대한 단죄권이며「세속적 존재의 존속을 가능케 해주는 자유」를 침해하는 불의에 대한 단죄권은 아니다. 예수는 지상적 정의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그는 시여를 강조했지만 그것은 균형을 위한 불타적시여에 대한 그의 교훈은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시여자를 위한 것이다. 즉 신적 정의를 위한 것이다.
지상적 정의는 기존의 체제를 폭력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실현 불가능하다. 예수는 이런 정의를 반대했다.『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여 이 족속들(사마리아인)을 태워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하고(사도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루까 9ㆍ54~55)
예수의 이 질책 속엔「체제는 그대로 두고 사랑으로… 」란 교훈이 암시돼 있다. 즉 교회의 최종 목적은 정의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달성될것이라는 얘기다. 교회가 신자 선량들에게 사회 정의의 입법화를 위해 헌신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마치 교회의 대정부 데모를 저지하기 위하여 동원된 신자 경찰관더러 데모에 가담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차라리 그들에게 사랑의 본보기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합법적인 치부」를 퇴색해 버린 어휘들로서 규탄하기보다는 차라리 제2 제3의 김홍섭 판사가 되어 주는 것이…
■ 사랑은 정의에 우선
사랑 만능을 믿는 태도는 얼핏 무저항주의처럼 소극적이고 퇴영적이며 시대착오적인 태도처럼 착각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지상적 정의를 내던지고 신적 정의만을 추구한다면 과연 와해되어 버리고 말 것인가?
여기에 대하여 마리땡은 말하고 있다.『그리스도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세계 내에서 내적인 긴장과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 정의선 및 사랑의 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서서히 수고스럽게 전달하는 운동을 유지하고 증대시킴으로써 그들을 반대하고 있는 대중에게 양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업은 헛될 수가 없으며 또 열매를 맺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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