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는 우리에게 많은 좋은 일을 한다. 더워야 벼가 잘 익는다든가, 참외나 수박의 맛이 더 난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고사하고라도 더위는 평소에 얘기거리가 없어 불편을 겪는 사람에게 좋은 화제를 준다.
푹푹 찔 때 이것 정말 더워 못 살겠다고 죽을 상을 하며 더위의 수난을 호소할 때, 그런 말은 대개의 사람의 공감을 얻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말이 어느 개인을 헐뜯는 소리도 아니고 보면 화제로서 매우 편리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혹서에 시달릴 때만은 인심은 이 공동의 수난 앞에서 결속의 미풍을 발휘할 것이다.
35ㆍ36도의 더위가 얼마나 가열한가 하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며칠 전에 겪어 봐서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늘을 찾아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질질 흐르고 숨기 칵칵 막힐 지경이다. 온종일 이런 더위에 시달리고 나면 밤엔 머리가 되게 얻어맞은 듯 띵하다. 아니 이런 땐 밤이 되어도 조금도 신통할 게 없다. 온돌이 가열돼서 따뜻해져 있다. 밤이 다 새도록 방안이 불의 도가니 같다.
이런 때 가령『이놈의 더위가 왜 이리 극성인가』하는 따위 염제에게 퍼붓는 욕설이 그 절정에 달할 것이다. 허나 이때에 우리는 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욕설을 퍼붓건 말건 간에 이렇게 혹독하게 더위에 시달리는 것엔 그 밑바닥에 뭣인가 후련하고 속시원한 쾌감이 따른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 또한 오묘한 사물의 이치일 것이다.
자연계엔 소위 「物理」라는 게 있다. 이 물리를 우리는 자연계의 생물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가령 기온이 내려가면 물은 얼어서 고체가 된다. 기온이 좀 오르면 물은 녹아 액체가 되어 졸졸 흐른다. 다시 온도가 오르면 물은 끓어 기체가 돼서 비등한다. 이게 물리이다. 허나 우리의 정신현상도 넓은 의미에선 이런 물리의 대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엄동에선 우리의 정신도 냉엄하게 얼어 붙는다. 봄이 되어 따뜻한 바람이 불면 우리의 정신도 녹아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 따라 행복한 꿈을 꾼다. 작열하는 태양의 계절이되면 우리의 욕신과 영혼이 더불어 타며 끓는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매우 귀중한 체험인 듯싶다. 본시 우리 생명은 불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죽음은 얼음이다. 몸과 마음이 불 탈때 우리는 우리 생명의 비밀을 조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실감을 갖게 된다. 이런 때엔 더욱 고호라든가 고갱이든가 하는 후기 인상파의 화가들의 그 극적인 (차라리 비극적이겠지만) 생애와 작품이 더욱 친근감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호소해 온다.
한마디로 이들은 타는 태양을 탄진한 여름의 천재들이다. 거꾸로 염천을 휘어잡아 그들의 예술에 시종 들게 한 거인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심령이 여름의 불꽃 이상으로 훨씬 더 강렬하게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숨 허덕이며 더위에 시달린다는 체험엔 무엇인가 순수한 것이 있다. 이런 순수, 가열한 체험은 일상생활에서 그리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염제의 무자비한 때엔 무엇인가 솔직한 게 있어 좋다. 더위를 더위로 받아들여 그것을 우리 심령의 경험과 결부시킬 때 더위의 미학이 나온다. 옛날 불가에선 더울 때일수록 추운 것을 생각하는 참선관법으로 더위를 물리쳤다던가. 이것 역시 더위의 미학의 한 토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너무 더워서 죽겠다』고 우는 소리만을 하지를 말자. 아무리 더위가 못 견디겠어도 그 예봉이 고작 2주면 가버린다. 이윽고 맑은 벌레 소리에 실려 찬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는 제행무상이란 느낌과 더불어 가열했던 여름을 그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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