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조까지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수백년대 주자가례의 가르침이 뼈속깊이 박힌 우리네 사회풍습 속에서 제사가 교리에 어긋난다 해서 조상위패(位牌)를 모시는 건 물론 제사참예조차 금지시켰던 시절에 천주교인들이 겪어야 했던 희비는 지금도 40대 이상 신자들 뇌리에 생생하다.
1791년 11월13일 윤지충 권상렬이 북경주교의 지시대로 조상제사를 거부하다 유생(儒生)들의 밀고로 불효자식이란 죄목으로 첫 순교한 이래 1939년 12월8일 『시체나 죽은이의 모상 앞에 또는 죽은 이의 단순한 이름이 기록된 위패앞에 머리숙임과 또는 민간적예모를 표시함은 가한줄 로 여길 것이다』라는 교황 삐오 12세의 「중국예식과 그에 관한 서약에 관한 교서」가 있기까지 150여년간 가톨릭 신자들은 제사와 신앙 사이에서 숱한 갈등을 겪지않을수 없었다. 조상제사가 천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라는 단정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판단은 『천주교인들은 제 조상도 섬기지 않는 불효 막심한 놈들』이란 욕을 먹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 크게는 박해를 일으키는 구실이 되었고 작게는 모처럼 진리를 깨달아 신자가 된 맏며느리의 이러도 저러도 할 수 없는 고민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한갖 조상들에게 효성을 국가에 사랑을 동포에게 예모를 표시함에 불과한 민간적 예식」임으로 제사를 봉행하거나 참예하는 것이 가하다는 전기 교황 삐오 12세의 교서가 있기까지 제사들 둘러싼 교우들의 작고 큰 고민은 또 이들을 사목하는 신부들의 고민이 아닐수 없었다. 『가문이 모두 천주교 신자인 경우는 문제가 없었지만 가령 제사를 봉행할 의무가 있는 종손이 신자가 되었다는가 또 이런 집안의 아녀자 한 두 사람이 신자인 경우 딱하지만 교회법대로 이 때문에 냉담자도 생겼고 전교에도 지장이 많았습니다』
1918년에 서품되어 지금은 90을 바라보는 어느 노은퇴 사제의 회고에서도 볼수있듯이 제사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단호한 그것이었다.
가문제사의 참예는 물론 그 제사의 심부름도 금했고 심지어 제사에 쓸 물건을 신자가 파는 것조차 피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니 가족이 모두 신자가 아닌 이상에야 조상전래의 풍습, 그것도 생활화되다시피한 생활질서를 거슬러 『나는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위패에 절하는 따위의 미신행위를 할수없소』하고 나선다는건 어지간한 믿음과 용기가 없는 한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야말로 신앙을 따르자니 가문에서 불효막심한 놈이 되고 가문을 따르자니 신앙교리에 어긋나는 심각한 갈등에 빠졌던 것이다.
더욱이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가장 강조해온 동방예의지국이고 보면 그 고민은 가히 짐작하도고 남을만 하다. 개 중엔 용감하게 제사봉행과 참예를 거부하고 나서는 신자도 많았지만 신앙도 가문도 버릴수 없는 신자를 위해 본당 신부들은 몇가지 편법을 고안해냈다.
첫째 여자인 경우 제삿날이 가까워 오면 신병을 핑계로 친정으로 피신케 하는 것이다. 시집에서 욕이야 먹겠지만 이 방법은 소위 여자 짝교우에겐 적절한 방법이었다. 둘째 참예는 하되 자발적으로 제사를 거들지 말고 될수있는 대로 두 손을 찌른채 말뚝처럼 서있기만 하는 방법이다.
이때 본당 신부는 단순히 돌아가신 조상에게 추모의 정을 표시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재삼 강조한다.
셋째 제사를 피할수 없는 처지의 종손이나 맏며느리에게 제사를 준비하되 여자는 『그저 집안 식구들 먹을 음식을 준비하듯』하는 마음으로 남자는 가능한 재래제사 의식과 천주교 의식을 병행토록 권장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교회의 제사에 대한 융통성 없는 해석의 제사에 대한 융통성 없는 해석에 다소 회의를 품은 진보적인 사고의 신부들이 권한 방법이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동서의 피안」을 번역 소개한 지인 김익진(프란치스꼬)씨가 하루는 서울 혜화동 보좌로 있던 오기선 신부를 찾아와 걱정을 털어놨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소식을 금방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집안의 장손이고 저의 집안은 신자가 아니니 필시 장례후 신주를 모셔야 한다고 할터인데 이 일을 어찌면 좋겠습니까』
『김 선생 집안을 보아 제사를 안할수도 없는 처지고 보면 제가 한가지 방법을 일러드릴 테이니 그대로 하시겠습니까』
『교리에 어긋나지 않고 지나갈수 있는 방법이라면 해보겠습니다』
『제사상을 방 모퉁이에 차리십시요. 그리고 김 선생은 그 가운데 계시다 가족들이 헌작할 때는 따라서 하시고 신자들이 연도할 때는 같이 연도를 하십시오』
호남지방 명문 거족의 장손 김익진씨는 이렇게해서 집안의 비난을 모면할수 있었다.
그러나 1939년 교황 교서로 제사문제가 일단 해결을 본 이후에도 제사 곧 우상숭배라는 사상이 깊숙이 박힌 천주교 신자들은 오랫동안 제사참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고 더구나 누가 제사음식이라도 가져오는 날엔 질겁을 하고 물러앉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제사가 가하다는 교황교서가 있은후 조선 8교구 주교들은 40년 6월13일 서울서 회합한 후 다음과 같은 교서를 발표했다.
『지금 군들의 감목 우리 교황성좌의 교서를 이 지방에 응용하야 이 지방 풍속과 관례의 성질이며 그에 관한 일반의 해석 여하를 자세히 살펴 그 실행의 가불가를 장차 신중히 분별하여 가리니 이를 보고서 교회의 신덕도리가 변함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할것이요 오직 만세불변하는 진리가 이미 변하여진 현대사람들의 정신을 용납하여 드림에 불과함인 줄을 잘 깨달을지어다』
이 교서는 제사를 단순한 효(孝)를 나타내는 예식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깨어나가고 있음으로 예식으로서 봉행과 참예를 허락할뿐 교회의 신덕도리가 변한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 신자들의 동요를 막으려는 의도를 엿보게 한다.
「조상 모르는 천주교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준 주재용 신부의 「선유의 천주사상과 사제문제」가 발간된 것은 1959년이고 이 책은 지식인들에게 천주교의 祭祀를 둘러싼 석연치 않은 이미지를 씻는데 큰 공을 남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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