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서 남쪽 멀리 모악산이 모인다. 가을과 겨울에만 산의 전체모습이 드러나 보이고 봄 여름에는 안개나 비구름에 가려져 있는 그 산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나는 산에서 온 사람인가. 바다에서 온 사람인가?』
산꼭대기에 오르면 나는 그 위에 무한히 펼쳐진 하늘이 아닌 아래골짜기를 바라보게 되는 일이 많았다. 바다라는 움직이는 깊이가 더 나를 이끌기 때문에 바다에 가면 가슴이 비로소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사실 깊이란 곡 높이이지 않는가?
나는 삶과 죽음. 영혼과 육신, 선과 악, 높이와 깊이, 산과 바다, 이런 이원적인 문제들에 오래 시달려왔다. 하느님을 만나기까지는 그것이 시달림이었는지도 모른 채 내몰린 것이었다. 스무 살이 되면서 서양철학에 기대볼 심산으로 눈에 띈 것이 싸르트르였었는데 그의 삶이나 책들이 전적으로 감동을 준 것은 아니고 그의 사유의 방식이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나로서는 거부감을 느꼈던 그의「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묘한 전개 끝에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바다로 흘러드는 것이었다. 결국은 하느님의 은총의 설리가 내 눈을 열어주셨겠지만, 그는 무신론자라기보다는 어렸을 때 이대로 가슴에 지녀온 정신적 상처의 아픔을 비명 지른 셈이었다는 깨달음이 온 것은 하느님을 만나고 나서의 일이다.
하느님은 온갖 사람들의 원망을 들으시느라 가슴이 늘 아프실 것이다. 내가 그분을 탓하지 않기로 진정으로 마음먹은 것이 지난해이니 철들고부터 헤매온 내 원망의 삶은 그분의 가슴바다에 얼마나 더러운 파도가 되었을까.
나를 부르신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히 찬미 받으셔야 할 것이다. 그분은 삶과 죽음의 혼돈에 넋을 잃은 내게 삶과 죽음의 하나 된 의미를 알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용서하는 체험이나 과거의 오욕을 현재에 오히려 감사드릴 수 있게 되는 기쁨 같은 방식으로 거듭 확인된다.
나는 영세 받던 날의 감동을 자주 되새긴다. 그날은 내 죽음이자 삶이었던 것이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오후가 되자 눈이 그쳤는데, 영세식은 차가운 물방울이 이마에 흘러내린 일과 양형영성체(성체를 성혈에 조금 적신)의 형언 못할 맛, 그 두 가지만 강하게 남아서 나를 늘 하늘의 행복으로 이끈다.
그 미사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 녹기 시작한길 위에서 나는 잠시 서 있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내 집은, 돌아가야 할 집은 이제 없다는 분명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 느낌은 기억상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스물여섯 해 동안 살아온 몸도 허물 벗은 느낌이었다. 그런 놀라운 일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밋밋한 삶속에 묻혀갔다. 그러나 새로운 내가 옛 기억만은 지닌 채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각성은 언제나 새롭다. 진정한 추억은 진정한 미래 기다리기에서 시작된다. 과거는 미래의 그림자가 시작되는 실체이다. 죽음은 삶과 함께 과거와 미래의 관계처럼 부드럽고 깊은 바다이다.
내게 영세를 결심하게 한 순교선열들의 삶은 죽음의 현란한 가치와 아름다움으로 우뚝하다. 순교자들은 이승의 생활이 그림자인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승이 더욱 값지다는 사실 때문에 완벽하게 이승의 삶을 정리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죽음의 바다에 나아가는 일. 곧 순교로 요약된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떤가? 우리가 사는「오늘」은 순교선열들이 택한 삶의 방식의 현장이었던「오늘」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나는 내 한 목숨의 비열한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공동체적 죄악을 표본으로 보려는 회심을 날마다 다시 하고 싶다. 삶은 원초적으로 천국이면서 방법적으로 지옥의 모양을 지니지만 이승의 연옥으로서의 성격까지가 하느님의 은총섭리 안에 녹아 흐른다. 우리는 하느님의 뜨거운 손바닥에 놓인 사랑의 존재인 것이다.
그 사랑이 녹을 때 , 구체적인 생활이 될 때 우리는 해탈하게 될 것이다. 해탈에 이르는 세 단계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렇다.
첫째는, 억압해소나 보상심리 현상으로서의 도취.
둘째는, 자기 이해의 단계, 즉 자기 존재의 현실성 혹은 정당성 찾기
셋째는, 해탈로서 세계의 안과 밖이라는 구별을 깨뜨리고 하느님과 종횡무진 일치의 신혼여행을 떠나는 일, 떠나되「세계 내」에로 떠나는 것.
그러나 해탈은 멀리에 있지 않고 내 안에 내 몸 속에 있는 것. 그러므로 내 몸을 내어주는 일이 해탈에 몸을 싣는 일이다. 맹인에게 내 안구의 각막을 주기로 약속하며, 내 벌이에서 얼마를 떼어 결연을 맺는 일이며, 교회를 죽도록 안고 사랑하기 위하여 피곤을 무릅쓰는 것도 해탈의 시작이다.
생각하면 나를 우주 안에 점지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갈 때까지 이승살이를 잘해가는 이 삶의 장소와 시간은 얼마나 미소한가. 나는 또 무엇을 누구에게 탓할 가치가 있는 존재이겠는가 밤에 눈을 붙이면 아침까지는 세상모르는 죽음의 매일을 겪는 미물인 것을……. 아, 이 출렁거리는 삶과 죽음의 바다에 떠서 드리는 찬미를 하느님은 세세 영원히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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