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칠세부동석」 규범에 성당안이라고 치외법권일수는 없었다.
하느님은「아담」「에와」를 낙원에서 같이 벗하며 지내도록 지어내셨지만 그것은 창조주의 일반적 배려일뿐 예의를 지극히 숭상하고 생활속에 철저히 실천해온 동방의 작은나라에선 적어도 남여가 7세가 넘으면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엄히 금했다.
그 백성이 다니는 성당이고 보면 아무리 미사에 참예한다 치더라도 어찌다 큰 남여가 섣불리 섞여 앉을수가 있으며 무리지어 한 집 안에 동석할수 있겠는가.
이래서 성당 안에는 남녀석을 완전히 차단한 두툼한 벽을 치게 마련이었다.
이 벽은 입구에서부터 제대 난간까지 천정에 닿아 남여석을 구분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성당을 반으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방에서 신자들은 제대만 처다보며 미사를 비롯 각종 예절에 참여했다.
그러나 점차 신식교육이 보급되고 개화가 이루어지면서 벽은 없어지고 대신 어른 키 높이의 판자벽으로 남녀석을 구분하다가 1925년경부터 지금 보듯이 마루바닥에 두줄 선을 그어 남녀석을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곳은 휘장을 치기도 했는데 경기도 지방에 두번째로 세워진 「하우개성당」(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지금은 공소)에는 광목휘장이 1925년까지 남아있었다.
『내외법이 엄한 시절이니 당연했지요.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겠지만 그때야 어디 감히 남여가 한자리에 앉을수 있으며 함부로 처다볼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완고한 동리노인들은 주일날 젊은남여들이 벽을 처 막았지만 성당안 같은건물에 들어가는 것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으며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가는 몽둥이가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벽을 막고보니 벽 때문에 일어난 웃지못할 일들이 한둘아니다. 한번은 당시 조선교구장 관(關) 주교가 원주본당에 견진성사를 집전하러 갔다가 마침 혼배자가 있어 이들의 혼배미사를 집전하게 됐다. 동리에 혼배만 있어도 신부 신랑 구경하려는 인파가 어지려울 판인데 더구나 평생 한번 볼까말까 한 귀한 주교님이 혼배미사를 집전하시니 그 구경 못했다는 평생 한이 될판이다. 성당 안팎이 꽉 찬 가운데 혼배성사가 시작됐다. 혼배서약이 끝나고 신부 손에 반지를 끼워주는데 신랑 신부 역시 벽을 사이에 두고 서 있으니 신부를 본 일이 있어 얼굴을 알겠는가 손모양을 알겠는가 혼배 때만 특별히 뚫어놓은 조그만 구멍을 통해 여자손이 넘어오자 신랑은 이 손이거니 하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날 저녁 흥겹게 잔치가 벌어진 자리에서 신랑집안 여나은실난 계집아이가 금반지 낀 손을 내보이며 자랑을 늘어왔다. 『아까 성당에서 주교님이 금반지 끼워줬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신부 손을 확인해보니 반지가 없지않은가.
예식때 신부 옆에 바짝 서있던 깜찍한 계집아이는 신부가 수줍어 손을 못내밀고 주춤거리는 틈을 타 제 손을 내밀었는데 그만 아무도 보지 못했던것.
계집아이는 신랑이 끼워준 건 모르고 앞에 서 있던 주교가 준줄 알고 자랑삼아 말을 했는데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모처럼 얻은 귀한 반지를 빼가자 대굴대굴 굴면서 울어댔고 결국 이튿날 혼배성사를 다시 할수밖에 없었다.
수원본당에서 있었던 일.
서울서 신식교육을 받은 두 남녀가 역시 벽을 사이에 두고 혼배성사를 받게됐다. 엄숙한 서약의 순간 신부가 신랑에게 묻는다.
『여기에 있는 OOO를 자모이신 성교회 법대로 당신의 아내로 맞아들이기를 원하십니까? 』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예, 원합니다. 』는 대답이 없다.
신부에게 물었지만 역시 묵묵부답.
이렇게 되자 신부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절을 중지하고 밖으로 내보냈다.
이러기를 몇번 오전 3시에 시작한 혼배성사는 12시가 되어서야 『예』란 말을 듣고 끝이났다.
그동안 신랑은 신랑대로 신부는 신부대로 가족들로부터 왜 대답을 안하느냐고 닥달을 받느라 사색이 다 될 지경이었는데 혼배가 끝나고 저녁이이 되어 말하는 이유를 들어본 즉.
『얼굴 한번 못 본채 부모님들 말씀만 듣고 결혼하는 것부터가 탐탁치 않았는데 벽을 사이에 두고 서고 보니 식장에서나 얼굴을 보리라던 기대마저 깨어져 얼굴도 못보고 어떻게 평생을 기약하누』하는 생각에 대답을 못했다는 것. 신부는 신랑이 대답을 안하니 대답할수 없었고.
미사보가 거룩한 예식에서 참여하는 예의표시로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의 미사보는 남녀 내외의 한 수단으로도 쓰여졌다.
지금은 대부분 손수건만한 미사보를 머리위에 얹지만 10여년 전만해도 덮고 때론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이와 폭이 넓었다.
그것도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에 단단히 붙들어 매어야 했고 미사보 없이 미사참예 했다간 『누굴 분심들게 만들 셈이냐』고 핀잔을 받기도 했다.
예배당엔 남녀를 가르는 벽이 없는데 성당엔 남녀 구별이 엄하다고 자녀들이 성당에 간다면 안심하던 시절.
지금으로부터 불과 50여년 전 얘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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